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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경섭 목사.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의 범위가 어디까지인가?’에 대해선 이견들이 있다. 혹자는 ‘아담의 원죄’에 그 범위를 국한시킨다. 어떤 이들은 ‘원죄(original sin)’와 ‘자범죄(actual sin)’를 포함시키되, 후자(자범죄)에 대해선 일정 부분 인간에게 책임을 지운다.


예컨대 ‘자범죄’가 구속을 받아도 그가 죄를 제어하지 못하면 ‘구원’에서 탈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자범죄’에 대해 최종적인 판단을 유보시킨다. 그것은 삶을 다 살고 마친 ‘죽음의 순간’이라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로마가톨릭의 ‘칭의유보론’이나 안식교(Seventh Day Adventists, 安息敎)의 ‘조사 심판(엘렌 지 화잇(Ellen G. White)에 의해 주창됨)’이 다 그런 논거에서 나온 것들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이 ‘원죄’, ‘현재와 미래의 자범죄’까지를 다 아우른다고 가르친다. 곧 그리스도의 피가 그 모든 죄들을 ‘단번에, 영원히’ 불가역적(不可逆的)으로 구속했다고 가르친다.


성도들은 이러한 ‘그리스도의 피의 공효(功效)’를 믿음으로 ‘구원의 확신’과 ‘안식’을 누린다. 그들에겐 ‘그들이 현재와 미래에 범할 수 있을 그들의 자범죄’가 그들의 ‘구원의 불확실함’의 원천이 못된다.


◈원죄 구속

죄인이 ‘아담의 원죄’를 구속받으려면,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받아야 한다. 이는 ‘그리스도의 피’가 그것(아담의 원죄)에까지 소급(遡及)해 효력을 미치는 ‘영원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피의 구속력(救贖力)이 ‘영원성(永遠性), 소급성(Traceability, 遡及性), 단번성(單番性)’을 가졌다고 말씀한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히 9:12, 15)”.


‘그리스도의 피의 구속’은 ‘영원’할뿐더러, 그 자체로 ‘완전’하여 죄인으로 하여금 그것에 아무 것도 첨가할 것이 없게 했다. 오히려 그것에 ‘인간의 공로’를 첨가하면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기운 것 같이 되어(마 9:16)”, ‘구속’을 망치고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한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1)”.


이렇게 그리스도의 피는 ‘단번에, 영원하고, 완전한’ 구속을 이루어 택자 구원을 공고하고 안전하게 했다. 어떤 경우도 그가 이미 얻은 구속이 훼손되거나 취소당하지 않는다.


‘원죄’가 ‘내 행위’와 무관하게 오직 ‘아담으로부터’ 내게 전가됐듯, ‘원죄의 구속’ 역시 ‘나의 의(義)’와 무관하게 ‘그리스도로부터’ 전가받는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의 경륜(economy of justice)’이다. ‘아담의 죄(罪)의 전가’가 ‘그리스도의 의(義)의 전가’를 합법화해 주었다.


◈자범죄 구속

혹자는 ‘원죄’는 인류의 ‘자기 통제(self-control)’ 아래 있지 않기에 그것(원죄)의 구속이 오직 ‘그리스도의 피’에만 의존하지만, 자기 통제가 가능한 ‘자범죄’는 그것에만  의존하지 않고, 일정부분 인간이 떠안는다고 한다.


즉 ‘성화(sanctification)’를 통해 ‘구속(redemption)’이 완성된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이 소위, 로마가톨릭이나 신인협동주의자들의 ‘성화가 칭의의 조건’이라는 논거를 낳았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자범죄’ 역시도 내 통제력 아래 있지 않다. 그것의 뿌리가 통제불가한 ‘원죄’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죄의 충동’을 받는 것도, ‘충동’을 받을 때 그것을 잘 제어하지 못하는 것도(물론 사람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그것이 ‘원죄’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자범죄’가 면책(免責)되는 것은 아니다. ‘원죄’에 죄책(罪責)이 따르듯 ‘자범죄’ 역시 그렇다. 그러나 그런 죄책(罪責)을 짐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에 대한 구속력(救贖力)이 그들 자신에겐 없다. 오직 ‘그리스도의 피’에만 그것이 있다.


이는 ‘원죄, 자범죄’를 막론하고 다 ‘그리스도의 피’로서만 구속을 받는다는 말이다.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히 9:12, 15)”.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 1:18-19)”.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원죄와 자범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0)”,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원죄와 많은 자범죄)’가 사하여졌도다(눅 7:47)”.


◈미래의 죄 구속

‘그리스도의 피’는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의 죄’까지 단번에, 영원히 다 속(贖)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히 9:12)”.


이 ‘단번의 영원한 속죄’는 우리에게 ‘구원의 확신’을 갖다 주며, 그 확신은 단지 ‘과거와 현재’에만 한정되지 않고 ‘미래’까지 확장된다. 미래는 미증유(未曾有)의 세계로, 내게 어떤 불안한 상황을 갖다 줄지 모르는 불확실함을 담고 있음에도 말이다.


예컨대 우리가 어떤 연약함을 드러내고 어떤 위경(危境)에 처할지 모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미래 구원’을 낙관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가 ‘미래의 죄’까지다 구속했음을 믿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마 6:34)”고 하신 것은 비단 우리의 ‘육신 문제’에 국한된 것이 아닌, 우리의 ‘구원’까지를 포함한다. 곧 ‘미래의 구원’에 대해 염려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고후 1:10)”,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시 121:8)”,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시 66:9)”.


마지막 미지(未知)의 여행을 떠나는 ‘죽음의 순간’에도 ‘우리의 구원’에 대해 염려하지 않음은 찬송가 545장(하늘 가는 밝은 길이)의 노랫말대로 ‘나를 구속하신 그의 사랑’이, ‘나는 부족하여도 예수님이 나를 영접 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 하리이다(시 17:15)”.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


※ 이 기사는 본방송의 공식입장이 아닌필자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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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2-10-23 01: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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