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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전야, 탁발 수도사들마저 타락한 영국의 실상 - [위대한 이단자들] 롤라드 신앙운동
  • 기사등록 2022-07-25 02: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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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세 시대 창립된 옥스퍼드 대학 채플. ⓒ픽사베이


거대한 역사적 사건은 하루아침에 발생하지 않는다. 여러 요소, 요인들이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고 갈등을 야기하고, 운동을 확산시키다 어느 시점에서 주목받는 사건으로 발발한다.


16세기 종교개혁 운동이라고 일컬어지는 교회개혁 운동은 유럽사에서 정신과 문화를 바꿔놓은 가장 큰 역사적 사건이다. 영국 종교개혁은 영국의 종교, 사상, 문화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이 사건의 배후에는 위클리프의 사상을 추종하는 ‘위대한 이단자들’ 무리인 롤라드인들(Lollards)의 신앙운동이 있었다.


영국판 ‘가난한 설교자들’인 롤라드인들은 위클리프의 신학적 주지들을 도시와 농촌으로 확산시켰다. 신약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청빈하게 살면서 교회의 부와 사치를 비판했다.


성자 숭배, 성지순례의 유효성, 고백성사, 화체설을 거부했다. 로마 교회의 가르침이 아니라 성경에서 생활방식을 배워야 한다고 했다. 목숨을 건 성경 영어 번역과 보급에 정신적 힘을 제공했다.


롤라드 신앙운동은 영국 교회가 로마 교회의 장벽을 뛰어넘을 수 있는 발판을 제공했다. 다름 아니라 그것은 헨리 8세 치하 영국교회의 독립에 필요한 정신적, 이론적 근거였다.


롤라드인들은 성경적 근거가 없는 로마 교회의 교권주의 전통과 미신적 관습에 항거하는 교회개혁 정신을 북돋았다. 성경의 권위를 교황의 권위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다. 영국종교개혁이 시작될 무렵, 여러 지역에 많은 롤라드인들의 후손들이 퍼져 있었다.


영국왕 헨리 4세는 롤라드인들에게 활동 금지령을 내렸다. 헨리 5세는 그들을 철저히 탄압했다. 많은 롤라드인들이 교회의 법정에서 부당한 재판을 받았다. 헨리 7세와 헨리 8세의 재위기간에 화형을 당하기도 했다. 로마 교회로부터 이단자로 정죄당했다.


그런데도 그들은 반성직주의 성격을 지닌 채, 비밀리에 영국 전역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1. 영국 교회의 풍경

14세기 영국 사회는 두 가지 큰 사건을 겪었다. 첫째, 예비 성직록 수임자 조례(the acts of provisors)로 말미암아, 교황권에 대한 완강한 저항이 절정에 달했다. 둘째, 영국 교회가 배출한 가장 독창적이고 열정적인 신학자 존 위클리프의 등장과 함께, 신학 주제들에 대한 사고(思考) 발상의 전환에 직면했다.


영국은 1377년 시작된 100년 전쟁(대 프랑스)과 1348년 참혹한 피해를 안겨준 흑사병으로 말미암아 커다란 사회적 변화를 겪었다.


영어가 공용어로 공식 채택되고 의회의 권한이 증대되면서, 부유한 시민 계층의 발언권이 강화되었다. 의회는 상하 양원으로 나뉘어졌다. 사회적 불안이 증대되고, 농노 계층의 권익을 주장하는 목소리들이 민담, 시, 소책자, 농민봉기, 폭동으로 표출됐다.


대전염병은 영국 사회의 구조를 바꾸어 놓았다. 물가가 천정부지로 치솟고, 소규모 자영 농민들의 많은 땅들이 젠트리 계층 지주들에게 넘어갔다.


인구가 줄어들자 양들과 가축들이 밭을 헤집고 다니며 곡식을 훼손해도 몰아낼 사람이 없었다. 농노들은 사회 불안을 틈타 노예 신분의 멍에를 벗을 기회를 찾았다.


그들은 유랑하거나 자영업을 하는 자유를 누리기도 했다. 전쟁 비용 때문에 세금이 인상됐고, 민중의 불만이 조직적인 반란 형태로 나타났다. 봉건시대의 막이 내려지고 있었다.


그 무렵 시인 윌리엄 랭런드(William Langland, 1330?-1400?)는 개인의 존엄성과 자유를 갈구하는 정신을 마음을 격동시키는 운율로 표출했다. 랭런드의 알레고리식 이야기 시 ‘농부의 불평’은 인간의 원초적 권리에 호소하면서 들불처럼 광범위하게 퍼졌다.


아담이 밭고랑 파고 하와가 실을 짤 때,
그때 누가 귀족이었던가?


랭런드는 평등한 인간 사회를 추구한다. 현실 세계의 인간의 속성을 대변하는 다양한 도덕적·추상적 개념과 인물들을 등장시켜 당대의 부패한 종교와 사회 그리고 인간성을 비판한다.


“귀족이라 불리는 저들이 무슨 권리로 우리보다 더 위대한 사람이어야 합니까? 무슨 근거로 저들이 우리를 봉건 신하로 부리는 것입니까? 우리 모두는 같은 부모 아담과 하와에게서 나오지 않았습니까? 지금은 그가 당신의 아랫사람일지라도, 하늘에서는 당신보다 더 귀한 사람이 되어 큰 복을 받을지 누가 압니까?”


1381년에 일어난 민중봉기 무리는 런던까지 진격했다. 일부 그룹은 런던탑을 장악하고 대감독 서드베리를 처형했다. 지탄의 대상이 된 처형제 폐지에 감독이 찬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봉기에 가담한 자들은 수도원들을 약탈하고, 수도사들을 학대했다. 민중봉기는 사회적 불평등 시정을 요청하는 사람들의 강렬한 의사표시였다.


대중은 성직자의 수요를 충당하는 교회의 토지와 재산을 제외한 나머지는 교구민들에게 분배해야 하고, 영국을 대표하는 감독은 한 명만 두라고 요구했다. 당시 교회는 영국 영토 3분의 1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산되는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


탁발 수도 운동은 사회봉사와 복음전도라는 선한 동기로 출발했다. 그러나 이 무렵에 이르러 게으르고 일하기 싫은 자들의 자유와 태만을 보장해 주는 수단으로 이용됐다.


교회의 부패도 만만치 않았다. 영국 전역에서 사람들이 탁발 수도사들의 구걸 행위에 불평을 쏟아냈다. 어느 감독은 흑사병으로 죽은 성직자들의 빈자리를 채우려고 교회 법규에 구애를 받지 않고 60명의 젊은이들을 성직자로 임명하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생활 필수품 가격이 치솟은 탓에, 사제들은 턱없이 부족한 급여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고위 성직자들은 교구민들의 불만을 의식하면서도 적절한 처방책을 제시하지 못했고, 하위 계급 성직자들의 탐욕을 정죄했다.


현세적이고 귀족적인 고위 성직자들은 대부분 몰염치한 겸직주의자들이었다. 세속직과 성직을 겸하고 있었다. 여러 교회들로부터 연금을 받았다.


대다수 하위 성직자들은 교육받지 못한 자들이었다. 성직자 신분이었지만, 왕궁과 젠트리들의 저택들에서 세속적인 일과 허드렛일을 해 주고 겨우 입에 풀칠을 하면서 살고 있었다. 이와 같은 모습에 대한 랭런드의 묘사는 아주 생생하다.


본당 신부와 소교구 사제가 주교를 찾아가
역병이 돈 뒤로 소교구에서는 먹고 살 길이 없으니
부디 면허증을 주어 런던에 가서 살게 해 주면
거기서 노래(구걸)하여 성직을 구입하여 살아보겠다고 간청했다.
돈이면 안 되는 게 없으니까.


각 교구는 자체 감옥을 소유했다. 감독은 말을 잘 듣지 않는 하위 성직자들을 감옥에 집어넣어 고해를 하게하고 심한 벌을 주었다.


그러나 고위성직자들은 풍족하게 살았다. 개인 장원(莊園)을 50개나 소유한 감독도 있었다. 규모가 큰 장원에는 거실과 예배당이 딸린 공식 관저들이 있었다. 고위 성직자는 자신의 장원들을 차례로 순회하면서 공식 업무를 수행했다. 성직 지원자들을 면접하고, 장원 청지기들에게서 회계 보고를 받았다.


이러한 짓을 하는 고위 사제 가운데는 막대한 기부금을 받아 그 돈으로 옥스퍼드에 대학을 세운 자도 있었다. 하위성직자 다수는 농노 계층 출신이었다. 성직을 임명받는 날이 농노 신분, 농노 계급에서 자유를 얻는 해방의 날이었다.


어느 시대나 성직자의 부패와 범죄에 대한 지적에는 과장이 심하다. 일부분을 가지고 전체를 매도하는 일도 흔하다. 그러나 이 무렵 영국 성직자들이 누린 혜택은 예사롭지 않았다. 불공평한 혜택은 날이 갈수록 민중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1396년에는 벌써 면죄부가 남발했다. 교회는 요크 대교회당 건축과 교량 건설과 도로 개설, 그 밖의 공공사업에 들어가는 비용을 충당할 목적으로 면죄부를 팔았다.


이 무렵에는 성직자 독신주의가 보편적으로 시행되지 않았다. 가정을 가진 사제들은 교회가 축적해 놓은 돈을 아내와 자녀들을 위해 사용해 비난을 받았다.


세인트 데이비즈 감독 드 라 베르는 사제들에게 첩을 두고 살도록 허용해 주고, 그에 대한 대가로 해마다 일정한 액수의 돈을 받았다. 부도덕과 무위도식이 성직자 사회에 널리 퍼져 있었다.


13세기 탁발 수도사들은 뜨거운 향학열과 복음전도의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14세기 탁발 수도사들은 그들에게 남은 것이 자기만족과 나태뿐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옥스퍼드 한 칼리지 교수인 아르마의 피츠랄프는 탁발 수도사들의 기강 해이와 미개한 행동을 지탄했다. 성 프란치스코가 주창했던 ‘복음적 가난’이라는 이론을 질타했다.


수도단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난은 성경적이지 않으며, 초대교회의 관습에서 유래된 것도 아니라고 했다. 피츠랄프는 이 용감한 주장 때문에 프랑스 아비뇽에 있던 교황청에 소환돼 궁지에 몰렸다. 교황청 감옥에서 1360년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진다.


돈과 명예를 바라고 민중에게 설교를 했고
자기 멋대로 성경을 해석했나니,
탐욕스런 욕망이 그러한 해석을 이끌어냈다.


랭런드가 프란치스코 수도회, 도미니크 수도회, 갈멜 수도회, 어거스틴 수도회의 폐해를 비꼬아 쓴 시의 한 대목이다. 탁발 수도사들의 활동이 세속화되고 본래 의도에서 많이 떠나 있었음을 말해 준다. 수도사들이 가난을 핑계로 민폐를 끼치고 있음을 지적한다. <<strong>계속>


최덕성 리포르만다 12회

                                                    ▲최덕성 박사. 


최덕성 지음, <위대한 이단자들: 종교개혁 500주년에 만나다>(서울: 본문과현장사이, 2015), 제7장 1부.  최덕성 박사 (브니엘신학교 총장, 교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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