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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빛 통해 완전히 회복시키는, 반 고흐의 ‘불빛’ - [서성록, 한 점의 그림] 낮은 곳에 임한 빛줄기, <감자 먹는 사람들> - 이성으로 해석 안 되는, 계시로서 하나님의 선물 - 미술을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응시한, 혁신적 화가
  • 기사등록 2022-04-19 00:5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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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 고흐, 감자먹는 사람들(캔버스에 유채, 82x114cm, 1885, 반 고흐 미술관 소장).

         <감자 먹는 사람들>(Potato Eaters, 1885)은 고흐가 부모님이 계시는 뉘엔의 집에 

           돌아온 시기에 완성한 것이다.


반 고흐는 자주 야외 사생을 했는데, 어느 날 작업을 마치고 귀가하던 중 여동생 코르넬리아 데 흐로트(Cornelia de Groot) 가정의 식사 장면을 보고 이 그림을 착안하게 되었다. 고흐는 이 작품을 습작이 아닌 첫 완성작으로 여겼을 뿐 아니라, 일생 동안 가장 자랑스러워 했던 작품 중 하나였다.


화면에는 농부 가족이 하루 일과를 마치고 조촐한 저녁식사를 하고 있다. 그들은 두툼한 옷을 껴입은 채 식탁에 둘러앉아 커피와 감자를 먹고 있다. 언뜻 보기에도 한기가 느껴질 정도이며, 그들의 얼굴에는 밭고랑과 같은 주름이 새겨져 있다.


그는 농부를 관찰 대상으로 여기기보다, 농부들의 삶과 존재 방식에 더 관심이 있었다. “나는 램프의 불빛 아래 감자를 먹고 있는 이 사람들이 접시의 감자를 먹는 그 손으로 대지를 팠다는 점을 보여주려 했어. 따라서 그 그림은 손노동을 보여주는 것이고, 그들은 자신들이 양식을 정직하게 얻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지. 나는 문명화된 인간들의 생활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이 그림을 그렸어.”


고흐는 세상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사람들을 조명했다. 베틀에 앉아 일에 몰두하는 직조공을 바라볼 때도 똑같은 생각이었다. “이 가난하고 비천한 노동자들에게, 말하자면 가장 낮은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낮은 이 사람들에게 무언가 감동과 비장함을 느끼게 되었지.”

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직조공들을 부각시켰듯이, 이번에는 농부를 같은 방식으로 나타내고자 했다.


그러나 아무리 의도가 훌륭하더라도, 그것을 인정해 주는 사람이 없다면 곤혹스러울 것이다. 고흐가 그랬다.


동료 화가 반 라파르트(Anthon van Rappard)는 이 작품을 보자 형태가 정확하지 않음을 지적하며 반 고흐를 질타했다. 심지어 그가 존경하는 밀레와 브르통의 이름에 먹칠을 한다며 비판을 쏟아냈다.


반 고흐는 크게 당황하였다. 고흐는 자신의 입장을 해명할 필요를 느꼈다. 고흐는 라파르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형태를 정확히 포착하는 것은 별 것 아니다”면서, 그보다는 ‘실재’를 끄집어내는 것이 우선이라고 주장하였다.


고흐는 화려한 수사로 가득 찬 작품보다, 교감할 수 있는 진솔한 작품으로 보이기를 원했다. 농부들을 주인공으로 선택한 것도 ‘진실과 정직’이 승리하리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라파르트가 고흐의 입장에 동의하고 사과를 했다는 흔적은 없다. 둘 사이는 이 작품으로 크게 금이 가고 말았다. 고흐는 “농촌이나 민중생활을 그리는 것이, … 파리에서 이국적인 하렘이나 추기경의 연회를 그리는 사람보다 더 나은 길”이라고 여겼다.


고흐가 생각하고 있던 ‘농촌 그림’은 서양미술사에서 유례가 없는 것이었다. 물론 그 전에도 농촌 그림은 바르비종의 화가들이나 그 영향으로 생겨난 헤이그파의 화가들에 의해 집중적으로 시도된 바 있으나 내용면에서 차원을 달리 한다.


고흐는 다른 화가들이 농부를 그릴 때 시늉만 낼 뿐 심중을 파고들지 못한 것은 “화가 자신이 농촌 생활에 깊이 파고들지 못해서”라고 하면서, ‘진정한 농촌화가’로서의 자신감을 피력했다.


그는 가톨릭 나사렛 운동(Nazarenes Movernent)이나 수도원 미술(Beuronese School of Art)과 같은 방식으로는 성경의 정신을 구현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근대적이며 세속적인 방식을 선택했다.


화면에 드러나는 모습은 여러 이미지들이 부유하는 것 같으나 그 이면은 풍부한 상징, 즉 종교적 의미로 직조되어 있다. 여러 미술사학자들도 이 점을 간파하였다.


메이어 샤피로(Meyer Schapiro)는 이 작품을 보고 “식탁은 그들의 제단이요 빵은 그들이 농사지어 얻은 성례물이다”고 했으며, 로버트 로젠블름(Robert Rosenblum)은 ‘예배를 보는 듯한 엄숙함’이 흐른다고 풀이했다.


캐슬린 에릭슨(Katheen Erickson)은 “가장 평범한 일에서 … 더욱 큰 감동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전한다”고 했다. 라영환은 기독교적 도상 대신 노동의 신성함을 전면에 내건 것은, 일상적인 것 속에서 신적 계시를 발견하고자 한 프로테스탄트 정신의 발현으로 파악한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이 그림이 종교적 도상을 취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종교성을 간직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에게 천정의 ‘불빛’은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 바로 지친 농부들에게 생기를 불어넣는 빛, 즉 호롱불이다. 고흐는 높은 천장에 달려 있어야 할 불을 의도적으로 낮게 끌어내렸다.


이를 통해 고흐는 “그리스도가 가정, 그것도 식탁 주위에,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 게다가 가장 일상적인 순간에 임재하심(Skye Jethani)”을 보여주었다. 불빛은 한기가 도는 실내에 따뜻함을 고루 나누어줄 뿐 아니라, 일상 공간을 거룩한 공간으로 바꾸는 구실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요 8;12)”이라고 말했다. 빛이 있는 곳에 생명이 있다. 이것은 성경의 위대한 원리이다.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님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빛을 보리이다(시 36:9).” 생명은 항상 빛을 뒤따르고 오직 빛만이 생명을 산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림에서 빛 안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 빛의 존재로 그들은 은혜와 위로를 얻고 있다. 감자로는 육신의 양식을 섭취하지만, 빛으로는 생명의 양식을 나누고 있다. 그러므로 불빛이 비춘다는 것은 곧 “빛 안에서 빛을 보는 것”을 의미한다.


고흐가 그린 빛은 이성 혹은 지성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계시로서 갈급한 심령들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총이었다. 기독교의 역사에서 볼 때 늘 신비의 베일 속에 감추어져 있었던 것, 그것이 바로 <감자 먹는 사람들> 속에 들어있는 것이다.


흔히 고흐는 개성파 화가들, 즉 폴 세잔(Paul Cezanne), 폴 고갱(Paul Gauguin), 조르주 쇠라(Georges Seurat) 등과 함께 후기인상주의 선구로 평가하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그는 미술을 전혀 색다른 차원에서 응시한 혁신적인 화가 중 한 명이다.


그가 보여준 시각은 지금까지 어떤 화가들도 도달하지 못한,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에 가깝다. 호롱불은 식탁에 모인 이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리스도의 불빛이 이들의 얼굴에 비추어 이들을 완전하게 회복시키고 있음을 느끼는 것은 혼자만의 상념에 불과할까?


서성록

▲서성록 교수.


서성록 교수

안동대 미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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