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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트리히 본회퍼, 오해와 편견 (2) - 본회퍼, 독일 민족주의 이면에 도사린 광기의 원천을 보다
  • 기사등록 2020-12-26 21: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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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7월 20일 벌어진 히틀러 암살 및 나치정권 전복시도에 가담했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
독일 집단적 민족주의, 인간의 폐쇄적 교만 반성
본회퍼 피조세계 고찰 출발점, 공동체 아닌 개인
독일 신학계 왜곡된 심성 사로잡혀 있던 점 간파

◈신학과 집단: 독일 집단주의의 역사적 배경

통상 본회퍼의 신학이라 하면 ‘공동체의 신학, 사회성의 신학’이라고 알고 있는 연구자들이 많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는 하나, 많은 이들이 이것이 본회퍼 신학의 결과적 단면이라는 사실까지는 충분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본회퍼의 피조세계 고찰의 출발점은 공동체가 아니라 개인이다. 신앙의 공동체와 사회에 대한 본회퍼의 사유는 원래 인간 개개인의 실존적 개별성을 깊게 분석하고 파고드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그의 최초 대표 저서 <성도의 교제>(Sanctorum Communio)는 공동체와 사회의 성격을 현대 루터교 신학의 관점에서 면밀하게 분석하면서, 평등과 존중의 관계를 파괴하는 인간 본연의 죄성을 벗어나기 위한 공동체 모델을 정립하는 데 주력하는 내용을 담아내고 있다.

그가 이 논문(<성도의 교제>는 본회퍼의 박사학위 논문이었다)에서 공동체와 사회, 즉 집단에 우선 주목한 이유는, 이를 집필하던 1927년 당시의 독일 교회와 사회 전반이 심각한 독단성과 폐쇄성에 사로잡혀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참혹한 패전으로 끝난 뒤, 독일 국민들은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 하에서 경제침체와 배패감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주된 원인으로는 19세기 비스마르크 집권기 이후 독일 내부에서 크게 강화된 우월감에 가까운 민족주의를 들 수 있다.

현대 독일의 원류라 할 수 있는 프로이센과 북독일 소국들은 항상 유럽 역사에서 주변부, 약체 취급을 받아왔다. 근대 전반부에는 오스트리아-스페인의 합스부르크 황가, 프랑스 부르봉 왕가, 스웨덴 제국 황가, 러시아 로마노프 황가 사이 알력과 전쟁 가운데서 말 그대로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역사를 겪어 왔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1618-1648년 치러진 30년전쟁을 들 수 있다.

이렇게 열악했던 북독일의 사정은 근대 후반부로 들어서면서 크게 달라지기 시작한다. 우선 18세기 프로이센 군주로 프리드리히 1세와 2세가 집권하면서 국력이 크게 신장되고 영토가 점진적으로 확장되었으며, 중세적 사고를 벗어나 계몽주의적 시대정신을 받아들일 채비를 갖추게 되었다.

18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는 임마누엘 칸트의 등장으로 서구 철학과 학문의 주도권을 획득하였고, 19세기 초 프랑스 나폴레옹 군의 침략으로 잠시 주춤하긴 했지만 이후 빌헬름 1세와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협업 하에 당대 유럽 내 최강국이었던 영국, 프랑스, 러시아에 뒤지지 않는 신흥 제국으로 부상했다.

쉽게 말해 독일은 길고 긴 유럽 역사 내내 기를 펴지 못하다가 18-19세기 들어와 급성장한, 비유하자면 갑작스러운 행운으로 졸부가 된 것과 같은 상황에 놓여 있었던 민족 국가였던 것이다.

통상 이와 같은 국가들의 정서적 특징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뿌리깊은 피해의식, 다른 하나는 극단적 폐쇄성에 근간을 둔 독단성이다.

주변국들의 강성함에 항상 위축되어 있었던 까닭에 타민족에 대한 적개심과 피해의식이 생겨났고, 항상 약자의 입장에 처해 있었던 이유로 주변에 자기를 개방하는 일을 경계해 왔다. 그리고 이런 심성이 수백년 이상 누적되면서 민족 전체를 짓누르는 고질적인 정신적 문제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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