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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제2의 남북전쟁은 이미 시작되었다! - 최은수 교수/ 영국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대학교 교회사 Ph.D. Berkeley GTU 객원교수, IME Foundation 이사장
  • 기사등록 2020-11-17 03: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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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수 교수

동성애 합법화로 촉발된 갈등



2015년 6월 26일은 미국 역사에서 지울 수 없는 치욕을 남긴 날이었다. 다름 아닌 미국 연방 대법원에서 동성결혼을 합법화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 전주곡은 동성애자들의 메카와 같은 캘리포니아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캘리포니아 주 대법원이 동성결혼을 허용하면서 그 포문을 열었지만, 곧 이어 2008년에 프로포지션 8(Proposition 8)이 주민투표로 통과되면서 주 대법원의 판결을 무효화시켜 버렸다. 필자는 당시의 상황을 너무나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초등학교의 어린 학생들로부터 실버 세대에 이르기까지 찬반 논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초중고등학교에서 치뤄진 모의 투표에서도 정확이 52:48 프로라는 결과가 도출되었다. 주민투표 결과도 이와 동일하게 나왔다. 그렇게 무효화시킨 것으로 종료되는 줄 알았던 동성결혼 문제가 미국의 사법제도를 교묘히 활용한 동성결혼 활동가들의 치밀하고 지속적인 노력으로 오바마 대통령의 재선을 기점으로 미 연방 대법원에서 합법화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필자는 이때로부터 미국은 정확히 두 진영으로 분열되었다고 본다. 수많은 사상자와 재산적인 피해를 입히고 상처만 남기고 끝난 남북전쟁이 발발한 지 정확히 154년 만에 미국은 제2의 남북전쟁의 위기 앞에 서게 되었다. 처음에 이 전쟁은 신앙과 가치관의 대충돌로 심각한 갈등을 촉발하였다. 아울러, 남북전쟁 당시와 같이, 제2의 남북전쟁도 북부와 남부의 현격한 차이를 다시금 마주하게 되었다. 일례로, 시카고를 품고 있는 일리노이주에서 시카고 이남에 위치한 남부의 전통적인 가치관을 가진 주민들에 의해 북 일리노이와 남 일리노이로 나누려고 하는 시도가 지속되고 있다. 한술 더 떠서, 캘리포니아주는 동서남북으로 또는 남북으로 나누려고 하는 시도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남북전쟁 당시의 상황과 유사하게, 미국의 남부 지역은 전통적인 가치관을 지지하며 동성결혼 문제에 대하여 강하게 반발하고 있으며, 지금도 그런 갈등은 진정되지 않고 있다.



캘리포니아 주청사 건물도 방비를 철저히 하고 있는 모습

두 동강이 난 신앙과 가치관



기독교 역사는 유사한 사건들이 반복되는 가운데서도 오메가 포인트, 즉 종말의 시점까지 직선으로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읽고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를 하는 등의 모든 신앙의 모습들이 ‘기억’(remember)하기 위함이다. 성경을 읽으며 성경의 사람들이 잘못 걸었던 길을 반복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고, 찬송가를 통해 은혜를 받으면서 과거를 돌아보며 오늘 위로 받고 오늘과 내일을 실수 없이 살고자 하는 다짐을 하게 된다. 이 모든 신앙의 모습들이 모두 역사의식의 과정이다. 미국 남북전쟁 당시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노예’라고 하는 경제적인 가치를 두고 충돌하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노예 문제가 가장 도드라져 보이지만, 실제는 비기독교적인 이해관계에 기반을 둔 정치적 상황에 기독교적 가치관을 내동댕이친 것이나 마찬가지의 결과를 낳고 말았다.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갈등을 통합하고 영적인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는 기독교가 어쩔 수 없는 상황에 함몰되어 질질 끌려가는 추태를 보이고야 말았다. 참으로 부끄럽게도 교회도 정치적 지형에 따라 남과 북으로 분열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여기서 잠시 생각해 볼 부분이 있는데, 필자의 시각에서 볼 때, 한국에 복음을 전해준 미국의 주요 교단들이 ‘남북으로 분열된’ 상태에서 각 교단을 대표하여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화해와 연합의 정신으로 한국으로 와서 하나된 각 교단의 총회를 발족시키고 하나됨을 추구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향후 역사의 발전 속에서 미국에서 ‘분열된’ 그들의 근본적인 정체성은 한계성을 가지고 있었고, 미국 본토에서 분열된 상태에서 벌어진 자유주의 신학 논쟁은 결국 한국에도 악영향을 미쳤고, 결과적으로 한국의 교회가 사분오열되는 교계의 분열에 단초를 제공하였다. 아울러 네비우스 선교 정책에 의거하여 미국에서 파송된 교단별로 선교지를 분할하여 선교의 효율성을 높인 것은 긍정적이나, 이런 분할이 역사적으로 전통적으로 축적된 반목과 질시의 골을 더욱 깊게 고착화시킨 면도 없지 않아 있었다. 미국 선교사들을 통해 각 지역에 복음이 전해진 것은 대단히 고마운 일이지만, 그들의 ‘분열된’ 정체성은 지방색을 심화시키고 고질적인 지역간 대립과 긴장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준 것 또한 사실이다.



다시 미국의 상황으로 돌아가서 보자면, 이런 치욕스러운 과거의 실패를 거울삼아 미국 기독교가 정신을 차렸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남북전쟁 당시에는 그런대로 살아 있었던 기독교 정신조차 내동댕이치고 극히 이기적인 치부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필자는 ‘기독교 정신이 빠진 자본주의의 폐해’와 ‘미국 기독교의 주류를 자처하는 백인 복음주의자들의 이기적이고 탐욕스런 모습’에 대하여 재차 비판의 잣대를 들이대고 싶다. 이런 기독교의 못난 모습을 하고는 결단코 영적 리더십을 발휘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기독교에 대한 반감만 부추겨서 더 큰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다.



미국의 주류 은행인 웰스 파고도 나무 판자로 겹겹이 둘러 방어 중

구체화 되는 제2의 남북전쟁의 징후들



동성결혼 합법화를 계기로 표면화된 신앙과 가치관의 갈등과 충돌은 이번 대통령 선거를 통하여 제대로 폭발하면서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필자는 제2의 남북전쟁의 징후들을 몇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려고 한다. 이런 징후들이 그냥 이론에 그치기를 간절히 염원하면서 말이다.



첫 번째로, 전쟁 발발 전에 나타나는 대중들의 불안 심리가 사라지지 않고 조용하면서도 강력하게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필자가 최근에 미국에서 그래도 사회지도층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전혀 예상치 않게 그들의 대화 가운데서 불안 심리가 여과 없이 드러나는 것을 목격하였다. 특히 백인이 아닌 유색인종들, 이민자 가족들, 사회적 약자들, 유대인들, 심지어 모든 면에서 안정적인 주류의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와 더불어, 얼마 전에 촉발된 흑인의 죽음 이후, 흑인들의 인권을 전면에 내세운 운동이 확산하면서 흑백 간에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미국 내에 6백만 명이 넘는 유대인들이 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회적 불안이 가중되는 시점에 예외 없이 ‘반유대주의’가 고개를 든다는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또다시 증오 범죄의 목표물이 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있는 중이다. 언제 어디서 이런 갈등이 폭발할지 모르기 때문에 주요 상점들은 나무 판자로 사업장을 이중삼중으로 둘러서 보호하고 있으며, 심지어 정부 관련 건물들도 이런 조치들과 더불어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방비를 철저히 하고 있다.



두 번째로, 미국은 역사적으로 정규군 못지않게 민병대의 역할이 지대했던 역사를 자랑하고 있는데, 미국 헌법이 보장하는 총기 휴대 권리가 자칫 지역 단위의 소규모 분쟁부터 전국적인 대규모 무력 충돌까지 야기시킬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점이다. 대통령 선거 이전부터 총기를 동원한 시위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목격되었고, 앞으로 직간접적인 무력시위들이 예견되고 있다. 2019년에만 7900만 정의 총기가 팔렸고, 2020년 현재까지 평생에 처음으로 총기를 구입한 사람들이 500만 명을 넘어서고 있다. 전 세계에서 인구 100명당 총기소유 지수를 조사한 결과, 미국은 인구 100명당 120.5로 단연 세계 최고였다. 즉, 인구수보다도 총기수가 훨씬 많은 나라가 미국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각 지역마다 총기 동호회가 있는데, 그들이 어떤 계기가 되어 민병대로 재편되기는 식은죽 먹기고 이미 무장된 그들이 어디로 움직일지는 상상이 가질 않는다. 더군다나 수도인 워싱턴에서 가까운 시일 안에 최대 100만 명이 참가하는 시위가 예고되었기 때문에 어떤 불상사가 일어날 지 전혀 예측할 수조차 없다. 이 집회에 적극적으로 참석할 의사를 밝힌 단체들 가운데 신나치주의자 들과 백인 우월주의 단체(KKK) 등이 포함되어 있어서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울 지경이다.




가게를 보호하기 위해 설치한 나무 판자 위로 낙서된 반항과 위협들

세 번째는 미국 역사도 마찬가지로 유사한 형태를 보이며 반복되며 전진하고 있기 때문에, 신앙과 가치관의 충돌이 자칫 엄청난 파장을 불러옴으로, 한물 간 듯한 개신교(기독교)와 가톨릭의 충돌 양상으로 번질 가능성도 없지 않다는 점이다. 필자가 여러 가지 소식들을 접하다가 섬뜩했던 순간이 있는데, 바로 조 바이든이 가톨릭 신자로서 로마 교황청의 교황과 통화를 했다는 내용이었다.



필자가 미국에서 백인 기독교인들과 대화를 하다가 매우 놀랐던 순간이 있었다. 우리는 피상적으로 케네디 대통령을 친근하고 대중적으로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반면, 그들은 손사래를 치면서 필요 이상의 거부감을 보였다는 사실이다. 생각해 보니 케네디 대통령도 아일랜드 이민자의 후손으로 가톨릭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그제서야 떠올렸다. 그런 측면에서, 바이든이 가톨릭 신자라고 하는 사실이 자칫 지금의 갈등 상황과 교차되면서 갈등이 폭발하는 단초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현재 미국의 신앙 분포를 볼 것 같으면, 미국의 개신교, 즉 기독교 인구가 전체 인구의 절반 이하로 떨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43퍼센트로 절대 우위를 점하고 있다. 가톨릭은 기독교에 비하면 한참 모자라는 20퍼센트 정도에 머무르고 있다. 미국에서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던 링컨이나 케네디 모두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역사가 있기 때문에 이 점을 우려하는 시각도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링컨은 남북전쟁의 원흉처럼 간주되어 미국 남부로부터 상상 이상의 반감을 샀고, 케네디는 가톨릭 신앙 때문에 절대 다수의 기독교인들로부터 살인적인 증오와 반목, 그리고 질시를 받았다. 이런 점에서 미국의 상황은 안갯속을 거닐듯 불확실성의 위기 가운데 있다. 재차 강조하지만, 필자가 제시한 징후들에 대하여 경계심을 가짐으로써 불확실한 상황들이 속히 해소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흑인소유의 사업체임을 표시하면 약탈과 반달리즘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이런 간판을 만들어 놓을 정도로 위기감 고조

기독교 정신의 회복만이 유일한 희망이다.



이런 불확실성이 심화되는 과정 속에서 정신 빠진 기독교는 속히 회개하고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 주류 기독교의 추태는 더이상 용납될 수 없다. 기독교가 정치를 비롯한 사회를 선도해야지 정치 색깔에 따라 신앙과 가치관이 흔들려서는 전혀 소망이 없는 것이다. 기독교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사회에 모범을 보임으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통한 은근하면서도 결정적인 영향력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가 나서서 사회적 갈등을 통합하고 사랑과 화해의 정신으로 민심을 움직여서 요동치 않게 역할을 해야 한다. 기독교가 탐욕과 이기적인 욕심을 가차없이 벗어던지고 낮은 자리로 내려가 섬겨야 한다. 이미 탐욕과 욕심에 오랫동안 노출되어 정신 나간 자본주의에 중독된 상태에서는 참으로 힘든 일이겠지만, 그래도 죽을 힘을 다하여 이런 중독에서 벗어나서 섬김의 자세로 낮아져야 소망이 있다. 그래야 폭발 직전의 갈등도 극복하고 불확실성이 비등되는 상황을 속히 끝낼 수 있다. 좋으나 싫으나 미국이 잘못되면 직간접적으로 고통당하게 되는 사람들이 전 세계적으로 천문학적 숫자만큼 많다는 사실을 깨닫고 살신성인의 자세로 사회를 선도해야 될 사명이 기독교에 있다는 점을 재차 강조하고 싶다.




한국 교회에 주는 교훈



미국에도 엄연히 남북갈등과 동서갈등이 존재한다. 신앙과 가치관의 갈등으로 말미암은 이런 분열과 질시와 반목은 결단코 기독교 정신이 아니다. 한국은 남북 간의 갈등으로 지구상에 유일하게 남은 분단 국가로 남아 있는 상태에서 아이러니하게도 동시에 최첨단 시대를 살고 있다. 그로 인한 이념 갈등은 한국의 기독교마저도 두 동강이를 내고 말았다. 이제는 동서 간의 갈등보다도 이념 갈등이 더 큰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중이다. 미국과 유사한 상황인데도 한국에 더 소망과 가능성을 두는 이유는 한국 기독교에 그래도 변화의 여지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변화에 굉장히 빨리 적응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런 정신, 즉 ‘빨리 빨리’의 정신으로 교회와 교계 지도자들이 빠르게 변화한다면 상당히 긍정적인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로, 이념 갈등을 부추기는 교계 인사들이 철저히 회개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제자리로 돌아와야 한다. 자신과 조금만 생각이 다르면 ‘빨갱이’로 몰아버리는 행태를 회개해야 하고, 반면 조금만 보수적인 듯하면 ‘꼴통 보수’라고 비판하는 밴댕이 속만도 못한 잣대를 가진 사람들도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 다른 것을 수용할 줄 알아야 성경적이고 역사적이다. 원수조차도 사랑하라고 외치신 말씀은 영원한 진리이다.



두 번째로 이념 갈등과 동서간의 갈등을 통해 조금이라도 비성경적인 감정과 태도와 생각들이 있었다면 철저하게 회개하고 성경적인 자리로 돌아와야 한다. 아직도 각 교단별로 인물은 생각하지 않고 지방색 망령에 사로잡혀서 무슨 탕평 인사라도 하듯이 나눠 먹는 행태는 속히 극복되어야 한다.



세 번째로, 정치적 이념에 휘둘리지 말고 기독교의 균형 잡힌 모습을 견지하면서 사회를 선도하기 위해 낮은 자리에서 겸손하게 섬겨야 한다.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이런 자세를 가져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만이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 길만이 생존하는 길이니 말이다.



네 번째로, 이전에 교황 방문을 계기로 한국에서도 기독교와 가톨릭의 긴장이 최고조로 비등했었던 기억을 잊지 말고, 상호 반목과 대립을 넘어서 평화롭게 공존하는 길을 지속적으로 추구해야 한다는 점이다. 지금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불확실성과 긴장은 인터넷망으로 촘촘히 연결된 지구촌에서 결코 남의 일일 수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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