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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하는 양반 ’ 주명준 교수와의 대담

- 은퇴 지도자들에게 한국교회의 길을 묻는다

편집국|2020-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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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최은수 교수 / 영국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대학교 교회사 Ph.D. Berkeley GTU 객원교수, IME Foundation 이사장

대담: 주명준 교수 / 순천 매산고 졸업, 전북대학교 사학과 학사, 석사, 박사, 전주기전여고 교사, 전주대학교 사학과 교수, 미국 신시내티 대학교 교환교수, 미국 장로교 역사 연구소 연구교수, 전주대 박물관장, 사범대학장, 대학원장 역임
▲ 주명준 교수 

최은수 교수: 40년 교직생활에서 은퇴하시고도 바쁘게 사역하시는 교수님과 대담을 나누게 되어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몇 년 전에 제가 미 남장로교회 파송 선교사님들의 족적을 찾아 전주를 방문했을 당시 주 교수님, 그리고 같은 학교 은퇴교수이신 영문과 심상욱 교수님 등 두 분의 환대와 대화를 잊지 않고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 이후에도 제가 궁금한 내용들이 있으면 교수님께 고견을 듣곤 했지요. 그때마다 너무 겸손하게 응대하시며 최선을 다해서 말씀해 주시어 그 자체로 감동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이 정확히 교수님을 뵈면서 든 생각이었어요. 교수님이 양성하신 수 많은 제자들도 스승님을 닮아서 겸손하게 일하며 사역하는 줄 압니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는 소위 ‘가방끈’이 길어서 교만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 가방끈이 자신의 교만한 목을 겹겹이 둘러서 극형을 당하기 직전의 사형수처럼 위태위태한 데도 여전히 자아도취에 빠져서 사람들과 더불어 살지 못하고 고립된 삶을 사는 불쌍한 사람들도 종종 있는 거 같아요. 저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주 교수님을 통해 진정한 겸손이 무엇인지 배웠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저는 교수님의 고상한 인품이 뿌리 깊은 신앙에 근거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알기로는 교수님이 전라남도 순천노회의 모교회인 장천교회 출신으로 부친이 주영옥 장로님으로 101세에 소천하셨고, 모친은 유영애 권사님으로 알고 있습니다. 형제 중에 네 명이 목회자고, 한 분이 장로님, 다른 한 분이 권사님이시지요. 주명수 목사님은 순천 은성교회 원로이시고, 주명철 목사님은 성화산 기도원 원장이시고, 주명갑 목사님은 영덕 강구교회 담임으로 시무 중이시며, 주귀은 목사님은 은퇴목사님이구요. 주 교수님은 5남 2녀 중 둘째신데, 목회자가 되는 것을 겸손히 사양하시고 평생 장로님으로 교회를 섬기고 계십니다. 집안의 분위기를 볼 때, 교수님에게도 어느 정도 목회자가 되었으면 하는 기대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교수님의 입장은 어떠셨는지요?

주명준 교수: 어머니는 내가 어렸을 적부터 목사가 되라고 말씀하셨어요. 남자 5형제 가운데 유독 나에게만 목사가 되라고 하셨어요. 중학교 다닐 때 친구들은 나를 주 목사라고 불렀지요. 어린 나는 여러 부흥회에 빠지지 않고 쫓아갔어요. 동생을 안고 잠재워야 할 때, 처음에는 슈베르트의 자장가를 부르다가 나중에는 어김없이 ‘웬일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를 수없이, 동생이 잠들 때까지 불렀는데 나중에는 반드시 울면서 불렀어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이 어린 나에게 어찌 그리 마음 아프게 다가오던지. 그러다가 점차 목사 되는 것이 두렵고 자신이 없어졌어요.

최은수 교수: 동서양을 막론하고 목회자가 되어 전문적으로 교회를 섬긴다는 것은 큰 영광이요 특권이지요. 그렇지만 16세기 종교개혁의 후예들은 각 개인이 자신의 자리에서 제사장이요 목회자라는 사실도 중요하지요. 화란의 개혁주의 지도자인 아브라함 카이퍼도 영역 주권을 말하면서 이 점을 더 구체적으로 발전시켰다는 사실을 잘 아시리라 생각됩니다. 그런 견지에서, 교회를 전문적으로 풀타임 목회자로 섬긴다고 과도한 대우나 불필요한 권위주의를 가질 하등의 근거가 없는데, 가끔 미꾸라지 몇 마리가 온통 물을 흐리게 만들 듯이, 순수한 교인들과 일반인들에게 부정적인 이미지를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천주교에서는 교황이 한 명이지만, 개신교는 모든 목회자들이 교황과 같다고 하는 말이 있을 정도이기 때문에, 개혁교회 목회자들은 더욱더 성경과 역사 앞에 겸손하게 나아가야 할 줄 압니다. 교수님이 신학 대신에 택한 학문이 역사입니다.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주명준 교수: 장천교회 주일학교에서 조인한 장로님이 ‘성경사화대집’이라는 책을 갖고서 구약에서부터 신약까지 그렇게 재미있게 이야기로 가르쳐 주었어요. 나는 그때 내가 역사라면 자신이 있다고 스스로 확신을 가졌고 그 생각이 나로 하여금 대학 사학과에 진학하게 하였지요. 여수에서 전북대학교로 왔더니 세상에 웬일인가 그 ‘성경사화대집’이라는 책을 번역하신 분이 나를 가르쳐 주신 박주황 교수님이셨어요. 그분은 장로님이셨고 나중에는 내가 봉직하고 있는 전주대학교 총장으로 오셨습니다.

최은수 교수: 교수님이 역사를 공부하게 되신 이야기를 들으니 고 홍치모 교수님이 생각납니다. 그 분도 평양에서 부친으로부터 성경과 역사에 대한 가르침을 많이 받았거든요. 교수님처럼 홍 교수님도 그런 영향으로 대학에서 사학을 공부하셨구요. 아울러 예장 통합측 총회장을 역임하시고 덕수교회를 설립하셨던 고 최거덕 목사님도 생각나고요. 제 경우는 사춘기 때 은혜를 받고 나서 인문학적 소질이 있다고 깨달았거든요. 그런데 주 교수님이 일반 사학을 공부하셨는데, 어떤 계기로 전라북도 교회 역사에 대하여 연구하시게 되셨는지요?

주명준 교수: 어머니의 나에 대한 사랑은 지극하셨습니다. 목사가 못된 나는 어머니에게 효도해야겠다는 심정으로 한국사 교수이면서 미국남장로교회사를 연구하게 되었지요. 미국 신시내티대학교에 교환교수로 있으면서 세계 각처에서 선교하다가 노스캐롤라이나주 블랙 마운틴과 몬트릿에 은퇴하여 마지막 삶을 보내고 있는 선교사들을 만나고 감명받았어요. 전주에서 선교하시고 은퇴하신 조요섭(Joseph Hopper) 선교사가 당시 몬트릿에 있던 장로교 역사 연구소로 찾아오셔서 얼마나 즐거웠던지요. 조요섭 선교사는 그 후 2년 뒤에 하늘나라로 가셨다고 들었어요. 증조할머니, 할머니(할아버지는 술을 좋아하셔서 끝내 예수를 믿지 않으셨다), 아버지, 어머니가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 때문에 예수를 믿게 되었고 나 또한 순천노회 선교의 아버지라 할 조의환 목사님으로부터 유아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미국남장로교회사를 연구하는 것은 나의 지상과제요 하나님이 주신 명령이라 스스로 생각했어요. 그렇게 하는 것이 어머니의 소망에 대한 보답이라 생각했구요. 나는 지금도 머리 허연데 성가대를 지휘하고 있지요. 그리고 교회에서는 안수집사를 거쳐 장로로 봉직하다가 이젠 원로장로입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니가 목사 안된 것이 참 서운했다.’라고 하실 때 나는 이렇게 위로해 드렸습니다. ‘어머니, 저는 평생을 미국 선교사가 전라도에 선교한 사실을 연구했고 학생들에게 강의할 때 단 한 번도 예수님에 대한 얘기를 빼먹은 적이 없어요’라고 안심시켜 드렸지요. 강의 현장에서 사명감을 갖고, 그러나 티 나지 않게 전도하였습니다. 지금은 목사님들의 세미나에 초청받아 역시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전라북도에 선교한 장면을 강의하고 있으니 나는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최은수 교수: 교수님에게 뿌리 깊은 신앙을 유산으로 남겨 주신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동기가 되었다니 참으로 감동이 몰려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교회를 모교회, 즉 어머니 교회라고 하지 않습니까? 실제로 교수님이 흘리시는 눈물의 사모곡으로 전라북도 지역의 교회 역사를 쓰시니 참으로 남다른 의미도 있고 생동감이 넘치는 것 같습니다. 교수님께서 ‘전주중부교회 40년사’ ‘장수교회 100년사’ ‘군산 해성교회 60년사’ ‘충남 금산교회 100년사’ ‘김제 원평교회 100년사’ ‘김제 연정교회 100년사’ ‘여수 장천교회 110년사’ ‘여수제일교회 110년사’ ‘남원 산성교회 60년사’ ‘전주 남문교회 100년사’ 등을 저술하셨습니다. 그럼 좀더 구체적으로 교수님의 연구에 대하여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주명준 교수: 나는 한국사를 전공했기에 가난한 인문학자이어야 할텐데 그렇지가 않았어요. 전라북도나 각 시군에서 역사를 편찬하는 일이 많아서 항상 프로젝트를 받아 연구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고서가 많이 있으나 자랑스러운 연구업적을 하나 꼽으라 하면 ‘전북의 기독교 전래’라는 책입니다. 젊을 때 전라북도 일대의 오래된 교회로 콧바람 날리며 쫓아다니고 무엇보다 연세 지긋하신 교인들을 찾아다니며 옛 교인들의 자취를 조사하였어요. 그 노력의 결과가 이 책에요. 보람 있는 일은 이 책을 2쇄까지 했으나 나는 단 돈 만원도 받아보지 못했어요. 신앙적인 관점에서 그냥 원하는 사람에게 주었고 서점에는 팔기만 하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전라북도의 교회사에 대하여 관심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내 책을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내 책을 보고서 교회사를 나름대로 공부하기 시작했다고 말한 분들도 있었어요. 그럴 때 나는 행복해요. 아쉬운 대목은 이어서 전라남도의 기독교 전래를 집필하다가 약 1/10 정도만 작업하고 포기하고 말았던 점입니다. 전라남도를 갈고 다닐 그럴만한 시간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어요. 내가 태어난 전남지역의 교회사를 쓰지 못한 것은 두고두고 후회스러운 일입니다.

최은수 교수: 교수님이 전라북도 지역 교회 역사를 충실히 서술해 주신 것만 해도 한국교회와 사회에 큰 공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한민국 정부에서 교수님의 40년 교직생활과 연구업적을 치하하며 ‘황조근정훈장’을 수여했다고 봅니다. 아울러 전라남도 교회사를 서술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교수님께서 부담을 갖지 않으셔도 될 줄 압니다. 제가 볼 때, 전라북도 교회사는 주 교수님이, 전라남도 교회사는 호남신학대학교 총장을 역임하신 차종순 교수님이 계시니 말입니다. 남북한을 통틀어서 볼 때는 부산과 경남 지역은 고신대와 백석대의 이상규 교수님이, 경상북도 지역은 장신대 임희국 교수님이, 북한 지역은 총신대 박용규 교수님이 나름대로 역사적 사명을 잘 감당하고 계시다고 보구요. 저는 좀 늦었지만, 미 남장로교회 파송 여성 선교사님들의 유지를 받들어 그분들의 미국 배경 연구에 최선을 다하며, 주 교수님과 학적으로 동행하고 있으니까요. 여기서 잠시 다른 질문을 드립니다. 어머니에 대한 사모곡을 부르시며 일찍이 교회 음악을 좋아하셔서 아마추어로는 굉장한 수준이라고 들었습니다. ‘음악하는 역사가’의 모습에 대하여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주명준 교수: 나는 한국사를 전공하는데 나의 전공보다 훨씬 잘하는 일이 있습니다. 음악이에요. 어머니의 뱃속에서 찬송가를 들으며 낳았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모교회인 장천교회 주일학교에서 배운 교육이 평생의 나를 만들었습니다. 반듯한 신자를 양성하기 위해서 주일학교 교육은 체계적으로 시켜야 한다고 믿어요. 교회에서 배운 음악 실력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지요. 대학 1학년 때 순천노회 주일학교 교사 수양회가 여수 성광교회에서 열렸어요. 교사 약 1천명을 모아서 1주일간 하기 아동성경학교를 준비하기 위해 수양회를 개최한 것인데 그 수양회의 하이라이트가 찬송가 독창경연이었어요. 내가 연세대 음대 성악과 학생을 누르고 1등을 했습니다. 턱없는 자만심인데 지금도 나보다 더 찬송가를 잘 부르는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교회에서 나를 그렇게 키운 것이에요.

신기한 것은 대학 사학과를 졸업하고 전북대학교 유영대 총장의 추천으로 전주기전여학교 교사가 되었는데 교장선생님이 나를 뽑을 때 유총장님에게 말하기를 자신의 교회인 ‘성암교회에 지휘자가 필요한데 혹시 가능한가’라고 물었다는 거에요.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허리를 다쳐 진학을 못하고 2년간 휴양하면서 교회 성가대를 지휘했어요. 그 덕분에 전주기전여자고등학교 역사교사와 전주성암교회 성가대 지휘자로 7년간 봉사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음악적인 소양과 나의 인연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대학원 석사를 마치고 이제는 7년간의 고교 교사를 끝내고 대학교수가 되기 위해 기도하고 있었는데 전주대학교의 교무처장이신 선배가 길에서 만나 대학으로 오라고 권하면서 그 대학 이사장님이 목사로 봉직하는 교회의 성가대를 지휘하라고 요청했어요. 그렇게 해서 전주대학의 교수가 되었고 그렇게 해서 30년간 대학에서 후학을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 나는 이것을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사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예정해 두신 프로그램의 덕분이라 생각하는데 이는 결단코 과장된 표현이 아니에요. 왜 그렇게 확신에 차서 말하는지가 궁금할 것입니다. 답은 간단해요. 나는 교수가 될 만큼 뛰어난 머리의 소유자가 아니에요. 미련하기 짝이 없는 나를 하나님께서 예정하시사 이렇게 들어서 쓰셨던 것입니다. 은퇴하자마자 배운 색소폰 연주 실력이 제법 늘었습니다. 가끔 예배시간에 색소폰을 불며 찬양할 때 그 기쁨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어요. 그리고 지금 서예를 홀로 공부하는 데 다들 좋아 보인다고 해요. 나는 열심히 일했고 이처럼 은퇴한 후 역시 열심히 즐기며 살고 있습니다.

최은수 교수: 은퇴 후 생활에 대하여 말씀하셨으니 약간만 더 언급해 주시겠습니까?

주명준 교수: 2009년 8월 은퇴하고 거의 매년 지역 교회사를 집필하였어요. 이제 편히 쉬는 것도 인간 체력 구조상 필요할 줄로 알았지만 호남지역에 수많은 교회가 있는데 이제 100년 가까이 되어가고 있는 교회가 수없이 많아요. 교회사를 연구한 나에게 각 교회에서 우리의 역사가 여차직하면 소멸되려 하니 책을 써 주세요 라고 요청하면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탤런트로 생각해서 수락하는 것이지요. 교회의 역사를, 그것도 자료가 거의 멸실된 교회의 역사를 책으로 엮는 일은 힘든 작업입니다. 사람을 찾아가 만나는 일 참 힘들어요. 1년에서 2년 동안 작업을 하는데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받는 중압감, 즉 스트레스가 엄청났어요. 그러나 내가 죽으면 누가 쓰겠나 싶어 다시 쓰곤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은퇴하고서 어느새 훌쩍 10년이 달아나 버렸네요.

최은수 교수: 전라북도의 교회 역사를 기록하시니 교회에 대한 시각이 남다를 것으로 생각됩니다. 교수님이 한국교회를 바라보시면서 나누고 싶으신 고견을 주신다면요?

주명준 교수: 그동안 나는 앞으로의 우리나라 교회의 앞날에 대하여 대단히 부정적으로 생각해 왔어요. 이유는 딱 하나 대형교회의 누리는 점 때문이었어요. 강의할 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소리쳐서 교회의 앞날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말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이유는 나의 네 명의 형제자매가 목사이기 때문이었어요. 그러나 개인적으로 이야기할 때는 직설적으로 우리 교회의 앞날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이야기해 왔지요. 지금의 우리나라는 기독교 신자들이 세운 기독교 국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자들이 많아서 요소요소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어요. 그러므로 기독교의 힘이 오래오래 갈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착각입니다. 한 방에 ‘훅’하고 날아갈 것입니다. 고려는 산속이 아니라 사람 사는 고을에 절이 널려져 있었습니다. 왕자 가운데 한 사람은 반드시 출가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고려를 불교국가라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불교국가인 고려는 이성계와 신진사대부인 정도전 등에 의하여 멸망하고 말았어요. 조선은 성리학이 종교도 아니지만 국교가 되어 불교의 승려들은 도성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버렸습니다. 그리고 읍내에 있는 모든 절은 없애버리고 산속에 있는 절만 살려 두었지요. 승려가 되려면 허가증, 즉 도첩을 받아야 했습니다. 승려를 천민처럼 대우했어요. 그런데 이게 또 웬일인가요? 600년 성리학 국가인 조선이 하루아침에 망하자 성리학, 유교도 아 옛날이여 하면서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제 아무리 강력한 종교일지라도 시류에 맞지 않으면 속절없이 사라져요. 그것이 우리 나라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웅장하게 예배당을 건축하여 위세를 부리면서 10만 명을 수용하고 있다고 자랑하는 것은 너무도 잘못된 현상입니다. 교회는 겸손해야 하고 낮은 곳에 처할 줄 알아야 해요. 그러나 나는 이제 교회의 이러한 면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거꾸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코로나 때문이에요. 윤보선 대통령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는 유명한 말을 했어요. 정말 올 것이 오고야 말았어요. 교인들은 6‧25전쟁 이후 처음으로 자신들의 예배당에 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헌금을 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헌금을 안 하고 보니 맛이 쏠쏠해요. 지갑에 돈이 굳는다 이거지요. 큰 교회는 한 주간에 1억, 2억의 헌금이 덜 나와서 걱정인데 큰 교회는 그래도 걱정이 없어요. 월세 내는 교회가 천지인데 그 교회의 재정적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한 번 교회를 떠난 교인들을 유턴시키기는 어렵습니다. 어떻게 할 것인가요? 1907년 평양 장대현 교회의 길선주 목사처럼 회개하는 길 만이 우리나라의 교회를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눈물로 회개할 때 하나님이 용서하시고 국민들이 다시금 좋은 눈으로 바라볼 것이에요. 코로나, 참으로 우리나라 교회에 위기를 가져다주었어요. 길거리에 나가서 베옷 입고 회개할 것이 아니라 골방에 들어가 눈물로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그간 너무 교만했습니다. 용서하소서라고 말이에요.

최은수 교수: 광야에서 외치는 세례 요한의 선포를 듣는 듯합니다. 교수님 바로 직전에 대담을 하신 심창섭 교수님도 세례 요한과 같이 깊은 울림을 주셨습니다. ‘한 방에 훅 간다’는 말씀 속에 수많은 역사적 함의가 들어 있다고 생각됩니다. 찬란한 기독교의 흔적을 남겼던 북아프리카와 중동 전체, 중앙 아시아 실크로드, 그리고 터키까지 이슬람화된 이후에는 아직까지 기독교 신앙의 주도권을 되찾지 못하고 있지요. 이외에도 세계 곳곳에서 기독교는 과거의 종교로 남아 있는 경우가 적지 않지요. 교수님의 말씀을 듣고 한국의 목회자와 성도들이 정신 ‘확’ 차렸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얼마 전에 교수님께서 전킨(전위렴) 기념 사업회 주관으로 군산에서 열린 모임을 통해 제가 쓴 ‘셀리나 리니 풀커슨 데이비스’ 선교사에 대한 글을 목회자와 참석자들에게 소개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데이비스 선교사는 독신 여성 선교사로 미 남장로교회 파송으로는 최초로 한국에 입국했는데요. 이 글은 이상규 교수님이 편집하시는 ‘부.경 교회사 연구’라는 학술지를 통해 출간될 예정입니다. 저는 여건이 되는대로 미 남장로교회 파송 여성 선교사님들의 유지를 받들어 그들의 미국 배경을 연구하여 발표할 예정입니다. 저도 순간순간마다 교수님이 선물하신 ‘전북의 기독교 전래’라는 역작을 참고하고 있어요. 앞으로도 목회자들의 모임에 가셔서 한국 교회를 위한 거룩한 외침을 힘차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후학들이나 한국교회 성도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을 주신다면요?

주명준 교수: “강하고 담대하라”(여호수아1:6)

최은수 교수: 역사가의 묵직한 한 방이 있는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교수님께서 30년이 넘도록 전주의 KBS, MBC, SBS, JTBC 등과 기독교 방송에 출연하고 계시는데요. 교수님의 이런 방송을 통해서 기독교인들에게는 광야에서 외치는 선견자적 음성으로 들려서 교회들로 정신 차리게 하고, 일반인들에게는 주님의 사랑으로 널리 전파되기를 소원합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 교수들과 함께한 주명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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