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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의 교육혁명, 지켜가야 할 소중한 유업”

- 선지자적 통찰력으로 ‘교육 한국’ 일궈낸 민족 지도자

편집국|2020-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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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육혁명가 이승만 대통령의 교육입국론  
▲ 김현태 | 현경사회복지회 | 466쪽 | 20,000원

이승만 삶의 전 궤적, 교육을 토대로 한 과정
독립운동 하면서도 교포 교육에 심혈 기울여
집권 후 의무교육 실시와 교사 양성에도 열정

“대한민국의 국가적 뼈대인 교육의 기초를 놓은 이승만 박사는 산업화, 민주화, 선진화의 초석을 다졌다. 교육대통령 이승만 박사가 대한민국의 선진문명으로서 교육입국의 받침을 다지고 그 높은 교육철학의 실천을 통해 한국을 넘어 인류문명사의 발전을 도모했던 그 고귀한 교육 건국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려 한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교육 분야 업적’을 다룬 서적이 발간됐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불편한 진실>, <이승만 박사의 반공정신과 대한민국 건국>에 이은 김현태 장로의 세 번째 이승만 연구 서적이다.

저자는 이승만 대통령의 평생을 ‘교육’이라는 관점에서 정리했다. 이승만의 정치적·외교적·경제적 업적에 대한 연구는 활발한 반면, 그의 ‘교육입국론’을 중심으로 교육 분야 업적만을 주로 정리한 연구물은 많지 않다는 판단에서다.

“이승만의 삶의 전 궤적은 교육을 토대로 한 과정이었다. 서당 공부에서 시작하여 배재학당을 거쳐 한성감옥이라는 ‘광야 대학’을 거쳐, 세계 최고 명문대학 수학을 통해 지식을 배웠다. 그 선진 지식을 통해 하와이 고도에서 독립운동과 함께 교포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고 해방이 되어 무지로 인한 노예적 삶을 청산하고 문명인으로서의 세계화를 꿈꾸었다. 어려운 국고에도 불구하고 의무교육 실시와 함께 교사 양성에도 열정을 다했고, 또한 많은 인재를 유학 보낸 데서 이승만의 교육입국 철학을 엿볼 수 있다.”

어린 이승만은 6살 때 이미 <천자문>을 뗀 신동이었다. 10세인 1885년부터 9년간 도동서당에서 수학하면서 <동몽선습>, <통감>, 사서삼경과 당송시문을 익히면서 과거 준비에 힘썼다. 11세 때 <통감절요> 15권을 독파하고, 19세 때는 시전과 서전 10권을 암송하며 천재로 불렸다.

그러나 14세부터 응시한 과거 시험에서는 번번이 낙방했는데, 이는 권력과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좌절한 이승만은 1894년 갑오개혁 이듬해이자 20세가 되는 1895년, 아펜젤러가 10년 전 설립한 정동 배재학당에 입학했다. 완고한 유교 집안에서 성장한 그가 기독교 선교사가 설립한 학교에 입학해 영어와 신학문을 공부하기 시작한 것이다.

학습 능력이 뛰어났던 이승만은 입학 6개월만에 신입생들에게 초보 영어를 가르치는 수준에 이른다. 서양 근대학문을 통해 정치적 자유에 눈을 뜬 이승만은 그 무렵 외세 저항운동에 뛰어들었고, 1895년 친일 세력에 의해 궁궐에 갇힌 고종을 구출하고 민비 시해를 복수하려다 발각되기도 했다.

이후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열성적으로 참여하면서 1897년 약관의 나이에 중추원 의관으로 임명돼 정계에 진출했다. 그러나 혼란스러운 정국으로 1898년 요시찰인물로 지목됐고, 이듬해 1월 의료선교사인 해리 셔먼 의사의 통역으로 동행하다 일본 영사관 근처에서 역모죄로 붙잡혀 한성감옥에 수감됐다.

선교사들은 그를 빼내기 위해 애썼으나, 이승만은 ‘독립정신에 위배된다’며 이를 사양했다. 탈옥을 시도하다 종신형을 선고받은 이승만은 잘 알려졌듯 감옥에서 기독교로 개종한다. 교육이 그를 구원으로까지 이끈 셈이다.

▲ 한 목사의 ‘기독교적 건국론’을 현실로 구체화한 이승만 건국대통령. 


기독교에 호의적이지 않던 그는 배재학당 예배에도 성실하게 임하지 않았지만, 불현듯 ‘네가 너의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지금이라도 용서하실 것’이라는 설교가 떠올라 ‘오 하나님, 나의 영혼을 구해 주시고 나의 나라를 구해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했다. 그 순간 독방에 빛이 가득 채워지는 듯 했고,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고 한다.

동·서양 학문을 두루 섭렵한 이승만은 배재학당 수학을 인정받아 유학 시절 조지워싱턴대학에서 학사 학위를 단숨에 획득하고, 하버드대학교에서 석사, 프린스턴대학교에서 한국인 최초로 국제법 및 외교학 분야 박사 학위를 취득하기에 이른다. 이 모든 일이 5년만에 이뤄졌다.

이후 38세의 이승만은 하와이에 정착해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그는 하와이 각 섬을 순회하며 이민 노동자들의 생활을 살피고, <한국교회 핍박>, 잡지 <태평양> 등 출판물을 통한 계몽활동에도 나선다. 하와이 YMCA를 설립하고, 한인기숙학교 교장을 맡은 뒤 순수 한인교육기관인 한인기독학원을 설립한다. 자신이 교육을 통해 깨어났듯, 다음 세대를 일깨우고 희망을 주기 위함이었다.

하와이 한인기독학원은 해방 후 폐교된 뒤 매각됐고,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매각 대금 중 일부로 전란이 한창이던 1951년 과학기술과 외국어 교육을 위한 고등교육기관 설립을 구상한다. 이는 지금의 ‘한국외국어대학교’와 ‘인하대학교’이다.

해방 직후 분단 한국의 문맹률은 80%, 전문학교 이상 고등교육 이수자는 0.2%에 불과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러한 여건 하에서 대의민주주의를 시행하려면 교육혁명을 일으켜야 한다고 주창했고, ‘초등학생 의무교육’을 실시했다. 그 결과 1959년까지 전국 학령아동의 95.3%가 취학했고, 문맹률은 22%(남성 11%, 여성 33%)로 떨어졌다.

학교도 대폭 늘어나 1960년 초등학생 수가 4,600여 학교에 360만 명으로 2배 늘었고, 중학생은 5만 명에서 53만 명으로 10배 이상 증가했다. 대학교도 해방 당시 20곳에 불과했으나, 이승만 집권 말기인 1960년 63곳으로 3배 이상 늘었고 대학생도 10만 명에 달했다.

1946년 이승만 박사는 ‘과도정부 당면과제 33항’을 공표했는데, 17항이 ‘강제교육령을 발하여 학령에 참여한 남녀 아이는 학교에 안 가지 못하게 할 것이며 교육경비는 정부에 담보로 할 것’이었다. 이는 향후 의무교육의 바탕이 된 교육입국론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당시 씨가 마르다시피했던 인재들을 적극 활용했다.

저자는 “신생 국가 운영에는 유능한 인재가 필수적이었으나, 일제의 우민화 정책으로 인재가 희소했고 특히 이공계 전공자는 2천여명 정도였다. 그나마 남북으로 갈라지면서 더 적어졌다”며 “이에 일제 하에서 교육받은 인재들을 활용할 필요가 절실해졌다. 이것이 친일파 숙청에 신중했던 이유로, 이를 두고 이 대통령을 친일파로 매도하는 것은 당시 국정철학에 대한 몰이해”라고 지적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교육혁명 드라이브’는 국민들의 교육열과 맞물려 1960년대 압축성장의 산업화 시대에 그 성과가 발현됐다. 저자는 “사실 1960년 (이승만 대통령을 하야하게 만든) 4.19 학생 의거 발발조차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민주주의 교육의 영향이 작용된 것”이라며 “이승만의 민주주의 교육이 역설적으로 학생들로 하여금 그의 권위주의 정치체제에 항거하는 자양분을 제공했다. 이른바 ‘토크빌 효과(Tocquevillean Effect)’”라고 분석했다.

▲ 제헌국회 개원식에서 이승만 박사가 연설하고 있다.  


6.25 전쟁에도 교육개혁은 멈추지 않았다. 피난통에 밥을 굶어도 아이들 손에는 책이 들려져 있었다. 교과별 이수 시간제를 실시해 중단 없는 면학을 독려하고, 북한 피난민 학생들은 별도 교실을 운영했다. 전시 생활에 필요한 교재를 3회나 발간하기도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가장 적합한 전투력을 지닌 대학생 젊은이들을 병역에서 면제시키는, 세계사에 유례 없는 특별조치를 내렸다. 그만큼 그는 승리를 굳게 믿었고, 전후 복구와 함께 국가의 미래를 내다본 것이었다. “박정희는 인재들을 지휘하여 한강의 기적을 일궜다. 그 인재들은 이승만의 교육개혁, 교육혁명이라는 기적으로 길러졌다.”

이승만 대통령은 6.25 이후 많은 과학자와 기술자를 미국에 파견해 훈련받게 했다. 해방 당시 미국 유학생은 500명도 안 됐지만, 이승만 집권기 유학, 훈련, 연수 등 다양한 형태로 미국에 간 인원은 2만여명에 이르렀다. 저자는 “이승만 대통령의 인재육성 정책과 교육 정책이 없었다면, 고급지식인력 부족으로 1960년대 산업화와 근대화에 큰 차질을 빚고 ‘한강의 기적’을 이루기도 매우 힘들었을 것”이라고 전했다.

특히 미국과 원자력 협정을 맺어 미국 원자로 제작업체인 GE사로 기술자를 파견·교육하게 했다. 1958년에는 인하공대와 한양공대에 원자력공학과를 개설했고, 오늘날 세계 6위 원자력 기술의 토대를 닦았다.

이는 미국 국부창출의 주축이 공업 발전이고, 그 원동력이 MIT에 있음을 주목했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은 전쟁의 폐허를 딛고 교육입국과 공업입국의 꿈을 실현하고자, 전후 복구의 초석이 될 기계·금속·조선·화학·광산·전기 등 6개 공학과를 인하공대에 개설했다.

저자는 “이승만의 교육입국론은 자신이 먼저 배워 익히고 실천하며 다음 세대를 교육시켜 나라를 세우는 바, 즉 배우고 가르치는 선순환 방법이었다”며 “이승만은 교육의 시대적 사명을 뛰어넘어, 조국 근대화를 꿈꾸고 그 토대를 마련한 선지자적 통찰력으로 ‘교육 한국’을 일궈낸 위대한 민족 지도자”라고 평가하고 있다.

이와 함께 “우리 민족은 이러한 희대의 위인의 공적을 무시한 채, 불완전한 인간이기에 저지를 수도 있는 국정에서의 실수를 침소봉대하여 외로운 고도에서 쓸쓸히 돌아가시도록 했고, 오늘까지도 그의 공적을 깎아내림으로써 문명인의 처신에 걸맞지 않은 행동으로 세계인의 조롱거리가 되고 있다”며 “자유민주주의 세계에서 나라를 세운 건국일을 기념하지 않고, 건국의 주인공 국부를 존경하지 않는 나라는 대한민국뿐”이라고 전했다.

또 “우리나라가 해방 직후 세계 변방의 최빈국 상태에서, 세계적으로 상위 10위권에 들어가는 부유하고 자유로운 민주사회를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이승만 대통령의 위대한 업적 때문”이라며 “하늘이 이 나라 이 민족에게 보내신 위대한 인물, 이승만 대통령의 애국정신으로서 교육혁명은 우리가 반드시 지켜가야 할 소중한 유업임을 잊지 않아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저자 김현태 장로는 1938년 경남 의령읍에서 태어나, 이승만 대통령이 세운 인하공과대학 기계과를 졸업하고 충주 비료공장에서 10년간 근무한 뒤 상경해 30여년간 기계제조업을 경영한 인물이다.

1970년대 수입에만 의존하던 집중윤활장치의 국산화로 기계공업 발전에 이바지해, 인하대학으로부터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지금은 일선에서 물러나 인하동창회 장학재단 하 ‘우남 이승만 박사 장학회’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을 역임했으며, 현경사회복지회를 통해 장학사업과 불우이웃돕기에도 힘쓰고 있다. 2018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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