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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시론]성직자의 정치참여 어떻게 볼 것인가? - 성경은 대적이 마귀뿐 사람대상 불허, 코로나19 방역에 교회가 협력해야
  • 기사등록 2020-08-31 16:3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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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흥선 목사.

이흥선목사(총신대학교 전문교육아카데미 교수, 개혁주의포럼 상임대표)



집단극화 현상과 양극화 현상

(集團劇化 現象, 兩極化 現像 )



작금의 한국교회와 한국사회를 바라볼 때 그 어느 때 보다도 ‘집단극화 현상’(集團 劇化 現象, group polarization. 애초의 의견이 집단적 논의를 통하면서 극단으로 강화되는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이러한 집단 역학 때문에 쌍방 간의 극단적 대립과 갈등이 끊이지 않고, 극심한 편견이나 증오가 이어지고 있다.



또 양극화현상(兩極化現像, 소득, 자산 등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어, 중산층의 지위를 유지하거나 하위 계급이 중산층으로 계급 지위를 상승시킬 수 없게 되며, 빈곤층이 증가하게 되는 사회현상. )이 우리 사회에서 두드러지고 있다.



이런 양극화 현상은 다분히 정치적 성향을 띤 사회적 현상은 물론 이런 양극화 현상이 한국교회에도 심하게 분출되고 있다. 특히 성직자들의 정치 참여로 인해 이런 양극화 현상의 간극은 더 넓혀지고 있다.



이로 인해 교회와 교회간 또는 목회자와 목회자간, 성도와 성도간, 목회자와 성도간 반목과 분열이 커지고 있다. 여기에 망국적인 포퓰리즘(Populism, 대중 인기 영합주의)까지 가세하여 공교회의 거룩성을 무너뜨리고 있다.



우리 한국 사회는 물론 한국교회까지도 세대간 또는 이념간 감정의 골이 더 깊어지고 있다. 즉 보수와 진보의 대립이 극심하다. 한국사적으로 살펴보면 한국 전쟁 전후로는 경제적 가난 때문에 국가적 경제 성장을 위해 일생을 바친 세대로 보수적 성향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2000년 이후 젊은 세대들 중심으로 한국 사회 부패의 장본인으로 보수 세대를 적폐로 치부하면서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다.



이들은 다양한 사회적 불안과 경제적 어려움의 원인들을 위계 문화와 기성세대의 부패에서 찾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때문에 보수 세대에 대립하는 소위 진보적 성향을 띤 젊은 사람들과 보수와의 대립이 점점 격화되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은 교회 내에서도 표출되고 있다. 진보적 성향을 띤 젊은 세대들이 보수적 성향을 띤 목회자들과 대립하면서 교회의 반목이 커지고 있다. 그런가하면 한국교회 내에서도 지연(地緣)적 이유나 자신의 정치적 성향 때문에 한국교회를 양극화의 수렁에 빠뜨리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교회 분열은 우리나라 초창기 교리적 분열 이후 지금은 성직자의 명예욕, 물욕, 권세욕과 함께 정치적 편승이 가열되면서 극도의 분열과 혼란 속으로 매몰되고 있다.



성직자들의 정치 참여와 권세자들에 대한 태도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들은 과연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성경의 가르침을 살펴보고자 한다. 본고는 일반 성도들보다 특히 목회자들에게 초첨을 맞춰 쓰여 진 글임을 참고 바란다.



구약에서의 선지자와 왕



그리스도인들의 정치 참여는 사회 구성원으로서 정치 참여가 가능하고 자기 의견을 표출할 수 있다. 하지만 성경의 가르침 안에서만 가능하고, 또 민주적 표출 방식이어야 한다. 정치에 앞장서는 목회자들의 타당성 근거를 들어보면 구약의 선지자들이 왕에게도 죄를 지적하였음을 근거로 삼는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세운 이스라엘 왕이 하나님의 뜻대로 백성들을 다스리지 않고 타락할 때 하나님이 세운 종(선지자)을 왕에게 보내 경고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 안에서 일어난 일이다. 곧 구원 받은 성도 안에서의 일임을 예표한다. 하나님의 종들이 왕된 성도(벧전2:9)에게 경고하여 바로 잡아준 예표적 의미이다.



구약성경에서 나단 선지자가 살인죄와 간음죄를 지은 다윗 왕을 찾아가 왕의 죄를 지적한 일이 있다(삼하12:1-14). 질책을 받은 다윗 왕이 바로 회개하거나 깨닫지 못했다. 그럼에도 나단 선지자는 왕에게 막말을 하거나 따귀를 때리는 등의 물리력을 일체 가하지 아니하였다. 선지자는 자신의 입에 넣어준 하나님의 예언만을 가감 없이 그대로 전할 뿐이었다. 구약의 선지자는 하나님께 받은 예언만 전하였다. 왕을 대하는 구약 선지자(종)의 태도였다.



신약에서의 성경의 가르침



신약은 구약의 방식과 전혀 다르다. 신약은 세상 왕들(세속 정권)이 사탄의 권세 안에 있는 자들(엡2:2)이기에 하나님은 이들에게 교훈 및 경고를 주기 위해 자기의 종들을 보내시지 않는다. 또 신약에서는 구약과 같은 예언을 주의 종들에게 주시기 않는다. 최근 일부 목회자들의 정치 참여와 대통령 하야 투쟁 등에 대하여 성경의 가르침은 무엇일까?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롬13:1,2).



그리스도인들은 권세 잡은 통치자들에게 복종하라고 명령하셨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에게서 나왔기 때문이다. 설령, 불신자인 왕(대통령)도 하나님이 세우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 사상과는 전혀 다른 의미이다. 성경은 인간의 모든 제도와 왕(권세자, 대통령 등)을 존대하라고 말씀하셨다(벧전2:13-17).



그러므로 성도들은 자신이 사는 곳에서 주께서 세우신 자들에게(롬13:4) 공손히 복종하는 것이 우리의 마땅한 의무이다(롬13:2,5,7). 이것은 권세자의 사적인 불법까지 수용하라는 말은 아니다. 범법을 일삼는 권세자는 법 규정 안에서 처벌될 수 있으며, 국민도 법 안에서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누구이든 간에 국가의 권위에 복종하고 법률과 제도를 준수해야 한다(벧전2:13). 그리고 국가에 내는 조세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롬13:6.7).



구약의 방식과 신약의 방식은 전혀 다르다. 전자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세상 왕들(대통령, 지배자)에게는 선지자(목자=목사)를 보내지 않는다. 구약의 선지자는 하나님의 예언을 받은 것만 전하였다. 이 예언에 자기의 생각을 첨가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신약은 그런 예언을 주의 종들에게 주시기 않는다.



권세자들에 대하여 사도바울의 설명을 들어보자.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롬13:1,2).



성도는 권세 잡은 통치자들에게 복종하라고 명령하셨다. ‘각 사람은’이란 단어와 ‘복종하라’는 말은 누구든 예외가 없다는 말이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에게서 나왔기 때문이다. 설령, 불신자인 왕(대통령)도 하나님이 세우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 divine right of kings) 사상과는 전혀 다른 의미이다. 왕권신수설은 성경적이 아니다. ‘위에 있는 권세들’은 비단 왕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국가 기관에 다양한 형태의 위 권세들을 포함한다. 성경은 인간의 모든 제도와 왕(권세자, 대통령 등)을 존대하라고 말씀하셨다(벧전2:13-17).



칼빈의 말처럼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통하여 우리를 구속적으로 다스리시는 동시에 세속 정부인 국가를 통해서도 우리를 통치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반은총이다. 세상 정권도 하나님의 소명이며, 하나님 앞에서 합당할 뿐 아니라 세상 집권자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이므로 그들을 배척하면 사실상 하나님을 배척하는 것이다(삼상8:7).



집권자들의 형태가 다양하다 할지라도 권세는 한결같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니(롬13:1), 심지어 일인 독재로 군림하는 것까지도 하나님이 주신 권세이다(잠8:15; 24:21 벧전2:17). 통치자도 하나님의 일꾼이다(롬13:4,6).



그러므로 성도들은 자신이 사는 곳에서 주께서 세우신 자들에게(롬13:4) 공손히 복종하는 것이 우리의 마땅한 의무이다(롬13:2,5,7). 권세자의 사적인 불법까지 수용하라는 말은 아니다. 범법을 일삼는 권세자는 법 규정 안에서 처벌될 수 있으며, 국민도 법 안에서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누구이든 간에 국가의 권위에 복종하고 법률과 제도를 준수해야 한다(벧전2:13). 그리고 국가에 내는 조세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롬13:6.7). 악을 행하는 자가 통치자를 두려워하지만 선을 행하는 자는 통치자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칭찬을 받게 된다(롬13:3).



그리고 집권자, 즉 권세자들 또한 하나님의 대리로서 그 직무에 충실해야 하며, 모든 정성을 다하여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섭리와 보호와 선과 후의와 공의를 나타내도록 힘써야 한다. ‘하나님의 대리’로 봉사한다는 각성 하에, 과오를 범하면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권력을 남용하여 백성들을 섬기지 않고 오만하여 악한 권세자로 행세하면 하나님께서 직접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절대 안 된다(롬12:19 히10:30).



권세자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세



첫째, 그리스도인들은 권세자들에게 복종하고 국가의 제도에 순종해야 한다(롬13:1-4, 엡6:5-7 딛3:1,2 벧전2:13). 모든 권세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



둘째, 그리스도인들은 권세자들을 대적하여서는 안 된다.



성경은 통치자들과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고 순종하면서 아무도 비방하지 않으며 다투지 말고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라(딛3:1,2)고 말씀하고 있다. 이것은 말로든 행동으로든 모두를 포함한다.



셋째. 그리스도인들이 싸우고 대적해야 할 대상자는 사람이 아니고 사단이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6:12)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이 말은 싸움의 대상이 사람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대적의 대상자는 “통치자들, 권세들,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로서 이것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귀의 다양한 방해 형태를 설명해 주는 내용이다. 이런 싸움은 세상 사람들은 할 수가 없고 오직 주안에 있는 성도들만 가능하다(엡6:10).



넷째, 마귀와 싸울 때 그리스도인의 무기는 오직 믿음과 진리와 기도뿐이다.



성도의 싸움은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싸움이 아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의 투쟁방식에 성도가 동참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성도가 마귀를 대적하고 싸울 때 어떤 무기로 싸워야 하는가?



➀ 믿음의 무기가 있어야 한다(엡6:16 요일5:4,5). 구원받은 사람에게만 이 믿음이 주어진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예수를 믿는 자)마다 세상(죄, 마귀)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예수 영접)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요일 5:4,5).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



➁ 사단은 진리의 말씀으로만 이길 수 있다(엡6:13-17).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셩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6:13-17)



➂ 사단은 기도로만 이길 수 있다(마21:22 막9:29 엡6:18).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마21:22).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조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막9:28,29)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미 마귀를 이길 수 있는 믿음의 무기가 주어졌다. 왕(대통령)이나 권세자들이 잘못할 때 성도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하라. 이 자체가 엄청난 특권이요 무기이다. 사람을 대상으로 한 물리력 행사(대적, 싸움)는 성도에게 허락되지 않았다(외적이 쳐들어 왔을 때 전쟁만 용인된다).



권세자들이 악한 자가 되어 백성들을 괴롭히고 악행을 저지를 때 그리스도인들은 기도만 하면 된다.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의 기도가 합당하면 응답하셔서 악한 권세자를 심판하신다. 기도는 이론적인 의식이나 형식이 아니다. 실제의 능력이다.



인간의 힘으로 나라를 바꿀 수 없다. 국가의 흥망성쇠, 인간의 생사화복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안에 있다. 내가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죄를 범해서는 안 된다.



이런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가져간다면 예수님은 무조건 용서하라고 말씀하신다. 구약은 율법아래에 있기 때문에 용서를 수용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무조건, 무한정 용서하라고 말씀하셨다(마6:14,15; 18:21 막11:25 눅6:37; 11:4 고후2:10 엡4:32). 원수까지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다(마5:43,44). 여기에서 원수는 나에게 최고의 해를 주는 사람을 말한다. 성경은 이 원수를 내가 직접 갚으려 하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면 하나님이 친히 갚으신다고 말씀하셨다(롬12:19 히10:30). 그러면서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롬12:14)” 오히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롬12:20)”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정치집회와 목회자의 자세



이번에 코로나19 확산과 연관하여 소위 극보수 국민들과 목회자, 성도들이 참여한 8. 15광화문 집회에 대하여도 논란이 많다. 이 때문에 교회 내에도 분열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번 집회에서 연단에 선 목사나 연사들의 발언 수준을 보면 저급한 속어가 난무하고 대통령을 향한 육두문자는 시장 잡배들을 연상케 하였다. 이런 형태는 보수를 비판하는 소위 진보적 세력의 언행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집회를 하나님은 싫어하고 성경은 배척한다.



그러므로 목회자나 성도들은 이런 집회 참여를 금하고 이와 유사한 각종 유튜브 방송의 시청도 금해야 한다. 이런 집회나 방송따위에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가? 오히려 악령의 역사만 넘쳐날 뿐이다. 집회나 방송에서 예수님의 인자와 용서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상대에 대한 배려나 겸손, 사랑도 찾아볼 수 없다. 반면에 상대 사람에 대한 비난, 비판, 미움, 이간, 판단, 정죄, 혈기, 분쟁, 원수 맺음, 당 지음, 분열, 싸움만 가득할 뿐이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5:19-21)



이 같은 집회에 참여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는 악한 불신자들의 행동에 동조하는 것이다(갈5:19-21). 이런 집회에 참석하면 할수록 위의 열거한 악한 영들만 충만하게 받아온다는 사실을 명심해야한다.



무엇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손의 물리력으로 쟁취하려고 하는가? 이것은 전능하신 삼위 하나님을 믿지 못한데서 기인한다. 내가 기도해도 하나님은 응답하실 수 없는 분, 이루실 수 없는 분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곧 하나님에 대한 믿음 없음이다. 이것을 형식적 믿음, 형식적 기도라고 말한다. 위선일 뿐이다. 이 때문에 한국교회가 타락하고 세상으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소위 애국집회에 참여하거나 동조하는 사람들은 이런 주장을 앞세운다. 현 정권이 좌파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공산화를 막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항변한다. 공산주의를 왜 싫어하는가? 독재를 하기 때문 아닌가? 자칭 보수 세력들에게 묻고 싶다. 현 정권을 빼앗아서 보수 세력이 10,20년 계속 정권을 유지했으면 좋을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이 생각 자체가 독재요 공산주의다. 필자의 생각은 이렇다. 한두 번은 특정 정당(세력)이 집권하고, 그 다음은 야당이 한두 번 씩 서로 바꿔가면서 집권할 때 견제와 균형을 이루는 정치 구조를 가질 수 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자신의 의사를 충분히 표출할 수 있는 제도가 바로 선거이다. 민주 국가에서 선거에 참여하든 안하든 이것도 자유의 영역이다. 강제하지 않는다. 민주국가에서 표를 통하여 자신의 의사를 충분히 반영시킬 수 있고 자신이 지지하는 정권도 이룰 수 있다.



한 국가가 공산화 되거나 주변의 대국을 통하여 식민통치를 받게 되는 것도 인간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떠날 때 주변 대국의 노예가 되어 종살이 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최고의 독재국가인 바벨론에 끌려갈 때 예레미야 선지자는 바벨론 국가에 대항하지 않았다. 다니엘도 마찬가지이다. 포로로 살면서도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의 계획이 있음을 믿었다. 이것이 다니엘의 70이레 축복의 언약이다. 그 엄청난 고난과 포로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십자가 언약을 은총으로 주신 것이다(단9:24-27).



이 시대의 종들은 이런 하나님을 계획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눈에 보이는 가시적 세계, 즉 혈과 육(사람)에 대한 싸움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세상에는 아예 진리나 정의가 존재하지 않는다. 하늘 아래에 새 것이 없기 때문이다(전1:9). 인간이 아무리 노력을 해도 정의는 세워지지 않는다. 이미 마귀가 잡고 있는 세상이기에 그렇다(엡2:2).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다(요일2:15-17).



그렇게 되지 않기를 기도해야 하지만 설령 만의하나 공산국가가 된다면 이것 또한 하나님의 징계요 심판의 영역 속에 있다. 인간의 물리력으로는 막을 수 없다. 공산화를 막으려면 회개의 기도만이 가능하다.



코로나19로 인한 비대면(온라인) 예배와 교회의 대응



이번에 코로나19 확산은 세계적 팬데믹 현상과 함께 우리는 Post-Corona 시대를 희망하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With-corona로 흘러가고 있다. 이제 우리는 현 상황을 거부할 수 없는 상황에서 비대면의 언택트(untact=noncontac) 시대를 맞고 있다.



교회마다 비대면(온라인 영상) 예배가 확대되고 있다. 코로나19가 급격한 확산세를 보이자 방역당국은 강력한 대면 예배를 금지하고 교회들의 협조를 당부했다. 그런데 일부 교회들이 헌법에서 정한 결사의 자유, 신앙의 자유 등을 침해하는 종교 탄압이라며 대면 예배를 강행하는 등 정부나 방역당국과 심한 마찰을 빚고 있다.



타종교와의 형평성 원칙에 반하는 행정명령이라는 오해 소지도 있지만 교회도 사회의 한 구성원이기에 정부의 방역행정에 교회가 적극 협조하는 것은 당연하며 성경적이다.



불교나 천주교는 비활성화된 형태로 유지된다. 그래서 전염병의 위험도가 낮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매우 활성화된 형태를 띠고 있다. 가령, 잦은 예배나 기도회, 각종 모임 등이 있어서 성도간의 접촉이 많을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활성화된 교회를 더 좋아하신다.



이번에 코로나19 확산이 특정교회와 이와 관련된 8.15집회로 인해 한국 교회 전체가 많은 공격을 받고 있다. 해당 교회에서는 바이러스 테러라는 주장을 하면서 방역 협조에 미온적이다. 이 때문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급속하게 확산되고 거리두기 2.5단계로 격상되는 단초가 되었다. 그리고 여기에 편승한 일부의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코로나19 검사를 기피하거나 허위로 동선을 누락시킴으로 인해 전염병의 확산이 가중되고 있다. 이들의 행동은 신천지보다 더 악하다.



잘못된 특정 목회자 한 두 사람 때문에 한국교회의 피해는 물론, 온 나라 전체가 극심한 고통과 피해를 입고 있다. 국민들에게 질병의 고통과 경제적 피해를 가중시킨 일에는 집회를 주도한 목회자들과 이에 동조하면서 참여한 일부의 그리스도인들도 책임을 피할 수 없다.



일정부분 방역당국의 책임도 있겠으나 이런 시국에는 누구의 잘못을 탓하기 전에 온 국민 모두가 협력하여 이 코로나 정국을 빨리 타개해 벗어나야만 한다.



비대면 예배의 행정명령에 반대하는 교회들도 다수가 있다. 하지만 대면예배나 비대면 예배나 공히 하나님이 받으시고 기뻐하신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도 하나님은 들으시고 함께 하신다(마18:20). 지나치게 대면예배만을 고집하면서 순교까지 각오하겠다는 발상은 구약적이고 안식일적 예배 방식이다. 신약의 영적 예배는 장소를 초월한다(요4:20-24). 그렇다고 대면예배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이제는 한국교회가 국가의 제도와 행정에 순응하면서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 이웃에게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때이다. 이것이 성경적이고 예수님의 가르침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많은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이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여 사회적 물의를 야기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종말의 7년 대환난설로 인해 현실을 도피하는 일들이 발생하고, 재림 후 천년 왕국론의 오석으로 신천지 같은 사이비가 등장하여 득세하고 있다.



역사적으로도 성경의 바른 가르침을 알지 못하여 성직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이 손에 물리력을 가지고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었다. 그것이 십자군 전쟁이다. 200여년에 걸쳐 총 8회에 걸친 십자군 전쟁(1096-1272)은 어린이까지 전쟁에 동원된 세계 전쟁 역사상 가장 잔인하고 참혹한 전쟁사였다.



권세자들을 대항한 물리력은 지금도 기독교 내에서 당연시 되면서 일부의 목회자들이 앞장서 자행되고 있다. 호세아 선지자의 말씀이 절실해진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호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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