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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70주년] 전란 속 성도·주민 보듬은 서기훈 목사 - 새벽 종소리 같은 사랑 이념의 상처를 감싸다
  • 기사등록 2020-06-30 16: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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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장흥교회 전경. 6·25전쟁으로 무너진 교회를 1955년 11월 재건했다. 전쟁 당시 서기훈 목사가 새벽마다 쳤던 종은 소실됐으나 교인들이 교회를 재건하며 종루를 만들고 종을 달았다.

철원 장흥교회 이금성 장로가 증언한 고인의 사역



7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지만, 강원도 철원 장흥교회 이금성(82) 장로는 그날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1951년 1월 눈이 많이 왔던 날이었다. 당시 13세였던 이 장로의 허벅지가 푹 묻힐 만큼 많이 쌓였다. 이 장로는 동네 형, 교회 사모와 함께 눈밭을 헤집고 다녔다. 전날 밤 인민군에 끌려간 서기훈 목사의 시신이라도 찾을까 싶어서였다.



서기훈 목사.

지난 20일 장흥교회에서 만난 이 장로는 그때 일을 떠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는 “서 목사님은 이념을 떠나 모두를 제 자식처럼 사랑하신 진짜 목사님이셨다”며 “눈 위에 난 발자국을 따라 인민군 병기고까지 갔는데 결국 시신은 찾지 못했다”고 말했다.



서 목사는 해방 후인 1947년 은퇴를 앞둔 65세에 장흥교회로 부임했다. 해방 후 38선 이북으로 북한 공산정권 치하에 있던 철원에서 반공운동을 하는 곳은 교회밖에 없었다. 서 목사는 늘 공산정권의 감시 대상이었다. 그러나 워낙 인덕이 높아 교인들뿐 아니라 공산주의자들도 서 목사 말이면 순종했다고 한다.



그러다 전쟁이 터졌다. 이 장로는 “6·25전쟁이 일어나던 해 봄 인민군 탱크가 철원 땅을 수없이 왔다 갔다 했다. 전쟁 준비를 했던 것”이라며 “당시 꼬마였던 내 귀에도 전쟁이 일어날 거란 얘기가 들렸다”고 말했다.



인민군이 남으로 밀고 내려갈 땐 조용했다. 그러나 9·28수복 이후 국군이 북으로 밀고 올라오면서 교회 청년들이 치안을 맡았다. 이 장로는 “서 목사님이 오시기 전 전임 목사님과 교회 청년들을 중심으로 반공운동 조직인 신한애국청년회를 만들었는데 그 청년회 출신들이 무장을 하고 마을 치안을 담당했다”고 말했다.



이들 청년이 인민군 몇 명을 사살하고 남아 있던 공산당원 가족들을 붙잡아 총살하기로 했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서 목사는 대로하며 교회를 떠나겠다며 짐을 쌌다. “어찌 목자가 양을 버리고 갈 수 있냐”며 피난도 마다하고 남았던 분이라 청년들은 깜짝 놀랐다. 이 장로는 “서 목사님이 형들에게 ‘너희에게 예수 사랑을 가르쳤지 원수 만들고 사람 죽이라고 가르친 적은 없다’고 호통을 쳤다”며 “그 말에 형들이 바로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고 회개했다. 붙잡았던 공산당원 가족들도 모두 풀어줬다”고 말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는 역전됐다. 이 장로는 “불에 안 탄 집이 없었다”며 “딱 한 곳 교회만 온전했다”고 말했다. 그는 “대부분 피난 가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방공호를 파고 들어가 굴에서 생활했다”며 “서 목사님 아들도 그때 같이 굴에서 생활했다”고 전했다.



이런 와중에도 서 목사는 새벽이면 교회에 가 종을 쳤다.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을 위해 날이 밝았다는 걸 알리기 위해서였다. 종을 친 후에는 어김없이 방공호를 찾아다니며 심방을 했다. 이 장로는 “서 목사님이 지팡이를 짚고 이곳저곳 다니시며 소식을 전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전했다.



한국전쟁의 아픔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는 이금성 장흥교회 장로가 고 서기훈목사순교기념비 앞에서 서 목사와의 일화를 이야기하고 있다.

중공군과 함께 인민군이 철원을 다시 점령하면서 주민들은 보복 위기에 직면했다. 그러나 공산당원 가족들이 서 목사에 의해 풀려난 사실이 알려지면서 주민들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 장로는 “공산당원들이 잡혔던 자기 가족들이 다 살아 있는 걸 보고 거기 간부가 여기 주민들은 건드리지 말라고 했다”고 말했다. 그는 “서 목사님이 우릴 살린 거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하지만 서 목사는 교회 청년들이 인민군을 사살했다는 이유로 51년 1월 8일 처형당했다.



장흥교회 마당 한쪽에는 1967년 건립한 서기훈 목사 순교기념비가 있다. 기념비에는 서 목사가 썼다는 짧은 한시(死於當死 非當死 生而求生 不是生)가 새겨져 있다. 당연히 죽어야 할 때 죽는 것, 이는 참 죽음이 아니오 살아있으면 살기를 바라는 것, 이는 참 생명이 아니라는 뜻이다.



지난 12일 한국복음주의협의회 6월 조찬월례회 및 발표회에서 서 목사의 순교를 조명했던 이덕주 전 감리교신학대 교수는 “서 목사님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는 성경 말씀대로 살았던 믿음의 사람이었다”며 “마지막 순간까지 양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린 선한 목자였다”고 전했다.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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