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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현의. 성경 속 식물 ‘돌무화과나무’ - 삭개오, 내려옴의 영성 얻다
  • 기사등록 2020-06-06 09: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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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사베이

성경에 나오는 ‘뽕나무’는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등의 서아시아에 자생하는 상록교목인 ‘돌무화과나무’이다. 돌무화과나무는 성서 시대에 여리고를 중심으로 한 요단 평야의 밀밭 사이에서 흔히 자라는 나무였다. 한글 성경에 돌무화과나무가 ‘뽕나무’로 잘못 번역됐다. 이 나무가 돌무화과나무로 불리는 이유는 무화과와 비슷한 야생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유월절 즈음인 초여름에 열매를 맺기 시작하는 무화과나무와 달리 돌무화과나무는 한여름이 돼서야 구슬만 한 열매를 수없이 맺는다. 이를 그대로 두면 떫어서 먹을 수 없다. 나무 위에 올라가 바늘로 열매들을 일일이 뚫고 그 자리에 올리브 기름을 발라주면 무화과처럼 달콤한 열매가 된다. 이를 성경에서 ‘뽕나무(돌무화과나무) 배양’으로 표현했다. 구약시대 아모스 선지자는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배양하는 자’라고 자신을 소개했다.(암 7:14)



‘오름’과 ‘내려옴’의 영성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눅 19:1~5)



삭개오가 군중 속의 예수님을 보기 위해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간 이야기는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하다. 여리고의 세리장 삭개오는 가난한 사람들의 돈을 착취해 자신의 욕망을 채워 온 사람이었다. 이런 그가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만나길 갈망했다. 그가 왜 예수님을 만나길 원했을까. 마음속에 채워지지 않는 진정성이 항상 그를 괴롭혔기 때문이다. 그는 ‘순수하다’는 뜻의 삭개오란 이름을 가졌지만 이름과는 정반대로 사는 자신을 볼 때 번민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예수님을 만나면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고민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모든 사람이 호기심으로 예수님을 만나러 왔지만 그는 변화에 대한 열망으로 예수님을 바라봤다.



예수님을 만나길 열망했던 삭개오(나무 위). 그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그린 성화.

키가 작은 그는 예수님을 보기 위해 길가에 있는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무시하는 삭개오에게서 열망을 보셨다. 그리고 그에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 19:9)라고 말씀하셨다. 삭개오는 이 말씀 한마디로 삶의 방식을 바꿨다.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눅 19:8)



삭개오의 올라옴과 내려옴의 행동. 그리고 신앙의 변화가 있던 장소가 바로 돌무화과나무 위였다. 돌무화과나무가 상징하는 ‘재생’ ‘회복’ ‘부흥’의 이미지를 다시 한번 떠올려 본다.



삭개오는 열등감, 고독, 소외, 배척당함…. 이 모든 것을 핑계 삼아 나무에 올라갔다. 가난한 자들의 등에 올라타 발로 밟듯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다. 주님을 만나기 전 그는 이웃을 착취하는 자였다.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 했던 자였다. 그런데 주님은 ‘그곳에서 내려오라’고 하셨다. 그는 더 이상 가난한 자의 양식인 돌무화과나무를 짓밟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라 결심한다. 그는 예수님께서 친절하고 따뜻하게 “삭개오야 내려오라”고 말씀하실 때 자신을 인격적으로 대하시는 주님을 만나게 된다. 그 후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한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서 구원을 받았으며,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회복됐다. 삭개오의 ‘내려옴의 영성’을 완성해준 것은 바로 돌무화과나무였다.



불공정한 노동현장



삭개오는 왜 많은 나무 중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을까. 성서학자들은 당시 여리고에서는 목자들이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서 열매를 배양하고 있었기 때문에 삭개오가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을 것이라고 말한다. 삭개오는 자신을 목자 중의 한 명으로 봐 주기를 바랐다는 것이다.



돌무화과나무 열매.

당시 돌무화과나무는 불공평한 노동의 현장이었다. 광야에서 양을 치는 목자들은 건기가 시작되면 광야에서 양을 먹일 수 없기 때문에 양 떼를 데리고 밀밭으로 간다. 목자는 밀밭 주인에게 양 떼들이 추수가 끝난 밀의 밑동을 먹을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그 대가로 밀밭 사이에 난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서 열매를 배양해준다. 밀밭 주인은 한 푼의 인건비도 지급하지 않고 엄청난 노동력이 필요한 배양을 끝낼 수 있다. 이런 계약 조건은 당시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던 떠돌이 목자들을 대상으로 한 노동력 착취였다. 당시 요단 평야 거대한 밀밭의 소유주는 사마리아의 부자들이었다. 목초지를 따라 반유랑 생활을 하던 목자들은 사회의 최하층 부류에 속했다.



돌무화과나무는 무화과나무보다 가치가 떨어졌다. 열매는 무화과보다 덜 달고 더 작다. 무화과나무의 잎은 매우 크지만, 돌무화과나무는 좀 더 작고 둥글다. 하지만 1년에 6회에 걸쳐 열매를 맺기 때문에 가난한 이들에게 중요한 열매 중의 하나였다. 가지가 사방으로 넓게 뻗어 나가기 때문에 넓은 그늘을 만들어준다. 돌무화과나무는 무화과나무보다 가치가 낮아 대부분 길가에 심겨졌다.



돌무화과나무는 길가에 심어진 흔한 나무였지만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 변화되는 장소를 제공했다. 돌무화과나무는 삭개오의 인생 이야기에 등장해 주인공 삭개오를 빛나게 해준 꼭 필요한 존재였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인생의 조연 또는 길가는 행인 1, 2의 단역을 맡은 것 같아도 어느 순간 하나님은 우리를 드라마틱한 이야기의 주연으로 캐스팅하실 것이다. “벽에 걸린 양탄자의 색실이 웅장한 디자인에 가려졌다고 해서 과연 그 색깔을 잃었다고 할 수 있을까. …사막의 황금은 시원한 샘물에 비하면 중요하지 않고 길 잃은 양에게는 위대한 왕보다 양치기가 더 소중하지. …사람의 가치는 뭐로 가늠할 수 있는가. 그건 천국의 눈으로, 하나님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자만이 알게 될 거야.”(영화 이집트왕자 ost 중에서). [이지현: 뉴콘텐츠부장 겸 논설위원 jeehl@kmib.co.kr]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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