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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기사가 되자 - 송길원 목사/행복발전소 하이패밀리 대표, 청란교회 담임
  • 기사등록 2020-01-20 21: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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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길원 목사

성경은 이른다.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잠 6:6) 개미는 지쳐 쉬는 법이 없다. 조는 일도 없다. 그런 개미도 움직이기를 포기한다면.... 중동의 더위를 놓고 하는 이야기다. 덥다. 무척이나 덥다. 이런 시간이면 팔레스틴 거민들은 대개 식사와 함께 잠시 휴식을 취한다.



아브라함이 잠시 쉬고 있을 때였다. 그의 눈에 띄는 무리가 있다. 세 사람의 나그네였다. 아브라함은 지체 없이 달려 나간다(2).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한다. 기다렸던 손님이라고? 아니다. 모른다. 약속된 사람도 아니다. 지나가는 객일 뿐이다. 그들에게 그늘을 제공한다. 쉬라고 한다. 먹거리를 내놓는다. 송아지까지 잡는다. 아브라함은 ‘먹기사’가 된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고... 그들이 말하는 것을 비켜서서 조용히 듣는다. 지켜본다. 어디로 가느냐고 따져 묻는 것도 없다.



훗날에 대한 기대를 갖고 뇌물(?)을 갖다 바친 계산된 호의가 아니다. 찾아온 이들을 천사로 알아본 것이 아니었다. 그저 그들의 형편을 딱하게 여겼다. 발은 부르텄다. 배는 고팠다. 아브라함의 마음속에 새겨진 ‘긍휼’이었다. 그의 마음결을 훔쳐볼 대목이다.



리브가라는 소녀가 그랬다(창 24:). 목마른 나그네, 할아버지의 목을 축인다. 사람만이 아니었다. 650~950km의 먼 길을 걷고 걸어온 낙타의 갈증을 본다. 무려 10마리였다. 0.6톤(600kg) 쯤 되는 물을 길어야 한다. 족히 2시간은 되었을 노동댓가를 지불한다. 그것도 기꺼이...(리브가는 나중 아브라함의 며느리가 된다.)



이스라엘 민족은 지나가는 나그네를 손 접대(hospitality)하는 것을 그 부족 최고의 명예요 의무로 인식했다. 그도 언젠가 허허벌판 광야의 나그네가 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접대는 광야를 살아가는 삶의 기본 문법이었다.



이런 관점으로 성경을 읽어야 할 곳이 많다. 이를 문화 신학이라 부른다. <떡 세덩이의 비유>(눅 11:5~8)가 그렇다. 한국교회의 기도를 오염시킨 대표적 비유다. ‘떡 강청의 비유’로 소개되었다.



‘뻔뻔한 기도라도 떼쓰면 들어주신다’고 가르쳤다. 하나님의 은혜를 ‘조건’으로 뭉개버렸다. 많은 비유들 가운데 가장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비참해 하는 비유가 떡 세덩이의 비유다. 비유에는 유대인의 ‘환대문화’가 있다. 주인공이 처한 상황은 ‘응급상황’이다. 밤중에 일이 벌어졌다. 나그네의 배고픔도 배고픔이지만 주인공 자신과 가족 전체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응급상황을 잘못 처리하면 동네에서 쫓겨날 수 있다. 아니면 죽음보다 더 고통스런 수치를 안고 살아가야 한다. 이유가 있다.



유대인들에게는 낮이든 밤이든 상관없이 자신의 집에 찾아온 손님을 극진히 대접해야 했다. 그것은 자신과 마을의 명예가 걸려있는 중요한 일이었다. 방문한 손님에게 대접할 새 떡이 없다는 이유로 손님을 그냥 방치하는 순간 자신에게 화가 미친다.



비유의 주인공은 매우 곤란하고 불편한 시간인 밤 시간에 친구 집을 찾는다. 친구도 이를 거절할 수 없다. 왜? ‘문이 이미 닫혔다.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다.’는 이유로 청을 거절하게 되면 그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다. 동네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만큼 손님에 대한 접대, 환대는 크고 소중했다. 그래서 비유는 밤 시간의 손님에 대한 응대 ‘매뉴얼’인 셈이다.



또다시 질문해 본다. 왜 이런 환대가 필요한가? 딱 하나다. ‘생명존중’이다. 누구도 배곯게 해서는 안 된다. 잠 못 자게 해서는 안 된다. 체면보다 더 소중한 가치다. 친구에게도 이로운 일이다. 동네를 위한 선한 일이었다. 주저없이 친구 집의 문을 두드린다. 친구에 대한 기대와 신뢰가 배경이다.



때문에 아브라함의 행위에는 이신칭의만이 아닌 ‘이친득구(以親得救)’가 있다. 친절을 통해 구원을 얻는다. 변장술로 아브라함을 찾은 하나님이 목적하는 바가 있었다.



“내가 그를 택한 것은 그가 자기 자녀와 후손을 가르쳐 하나님의 생활방식을 따라, 친절하고 너그럽고 바르게 살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을 이루려는 것이다.”(창 18:19 TMB)



이런 이친득구의 배경이 될 성경구절들을 들춰본다.



“이 세상 만물의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 무엇보다도 서로 사랑하십시오. 여러분의 삶이 거기에 달려 있다는 듯이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실제적으로 무언가를 만들어 냅니다. 굶주린 사람을 보거든 서둘러 식사를 제공하고 집 없는 사람을 보거든 기꺼이 잠자리를 제공하십시오. … 그렇게 하면,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찬란한 임재가 예수를 통해 환히 드러날 것입니다.”(벧전 4:7~11 TMB)



“식사나 잠자리를 구하는 이가 있으면, 기꺼운 마음으로 제공해 주십시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환대한 이들이 있었습니다.”(히 13:2, TMB)



더 이상 무엇을 지체하랴. ‘환대’는 ‘땅을 정복하라고 다스리라’(창 1:28)는 창조명령의 작전명(코드)이다.



“내가 너희에게 친절하니(환대하였으니) 너희도 친절하라.(다른 이를 환대하라)”-cf. 요 13:14, 15, 34,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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