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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지에서 정통교회로 개종한 20대 여신도의 간증 - "교육·기합·훈련 강행군, 군대 같았어요."-4개 교회서 '신천지 추수꾼'까지 했던 한 자매의 간증
  • 기사등록 2019-12-16 07: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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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3년 동안 신천지 예수교 증거장막 성전에 있다가 2006년 11월에 정통 교회로 개종한 20대 여신도의 간증입니다. 이 신도는 목회자의 딸로서 신천지 측과는 '이메일 교제'를 통해 접촉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좀 더 열심히 하고 성경을 정확히 알아야겠다는 열성이 신천지와 연결되는 매개체가 됩니다. 이 글을 통해 신천지 안에서의 전도특공대 생활과 정통교회 내부로 들어와 추수꾼 활동을 어떻게 하는지, 길거리에서 직접 포교에 나설 때는 어떤 모습으로 활동하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그녀는 신천지에 있을 때 매일 성경구절 암송, 스피치 훈련, 섭외자 관리, 기합, 정신교육 등을 받으며 하루 1~2시간 정도밖에 취침하지 못하는 강행군을 했다고 말합니다. 목회자의 딸이 어떻게 신천지라는 단체에 빠지게 됐는지, 그리고 그곳 생활은 어떠한 것인지 구체적으로 살필 수 있는 간증입니다. (편집자 주)
신천지 체육대회 개막식 모습.

- 신천지는 기존교회 교인들, 신학생, 목회자들을 미혹하고 있다.

- 신천지 피해사례 고발한다.

- 신천지는 기존교회 교인들, 신학생, 목회자들을 미혹하고 있다.



저는 2006년 11월11일에 신천지예수교 증거장막성전 베드로 지파에 있다가 구원받은 청년 박○○(24)입니다. 저는 목회자 가정에서 태어나 믿음 안에서 성장하면서 항상 은혜를 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대학교 입학을 하고 대학에 대한 기대와 전공에 대한 탐구심으로 학교생활을 하면서 저는 3명의 JMS 사람들에게 섭외를 당했고, 그 사람들이 주장하는 말을 듣고 '이단 같다' 생각했지만 동시에 '내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지만 말씀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구나'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JMS를 만나고 나서부터 성경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어졌고 '체계적으로 성경을 가르쳐 주는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갈급함이 있을 때 신천지 사람들이 섭외를 했고, 그 당시 이단 경계가 컸던 저는 그들에 이메일 주소만 알려주었습니다. 그들은 이메일을 집요하게 보냈고 저는 그 메일을 읽었습니다. 3~4번의 만남 끝에 그 사람들은 저에게 ‘말씀을 체계적으로 배워보지 않겠느냐’고 말했고 저는 기회다 싶어 '그렇게 하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하던 일이 많아 성경공부를 많이 하지 못했지만 1년 동안 복음방(신천지 측에서 신학원에 들어가기 전 단계에 진행하는 성경공부)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저를 신천지 측에서는 목사님의 딸이고 시간도 많이 걸리니 그냥 탈락시키라고 했지만 관리자와 교육자는 저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비유를 배울 때 세례 요한이 배도자라고 했습니다. 솔직히 납득이 안 되었습니다. '왜 세례 요한이 배도자지? 모든 기독교 서적엔 순교자라고 나와 있는데? 성경에도 흔들리는 갈대가 아닌 선지자라는데?' 그러한 의문으로 저는 항상 교육자에게 세례요한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그때마다 같은 대답을 들은 저는 '세례 요한은 배도자'라고 합리화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니 배도, 멸망, 구원의 노정순리가 믿어지면서 세례 요한을 배도자로 믿게 되었고 마지막 새 하늘과 새 땅 비유를 배울 때는 설마 신천지는 아니겠지 생각하며 말씀을 공부하였습니다.



드디어 저는 신천지 교회로 유월을 하였고 그곳이 신천지라는 것을 알고 심한 충격에 빠져 2~3주간 신천지에서 말하는 이단시비에 걸렸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대학 친구들을 보았고, 그들과 정을 쌓다가 신학원에 가게 되면서, 말씀에 확신을 느끼고 ‘신천지는 이단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학원을 다닐 때 목회자인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많이 울었지만, 가족을 살리기 위해서 어떤 사람들보다 더 열심히 강사의 말을 녹취하며 수업을 들었습니다. 수업의 결론은 이만희 씨가 이 시대의 구원자이며 계시를 받은 보혜사요, 사도 요한격 목자이고, 계시록 2~3장의 이긴 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씨가 이 시대의 구원자·보혜사·사도 요한격 목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창설한 신천지 12지파 증거장막성전은 이 시대의 천국이고 14만4000명이 되려면 열매를 꼭 맺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수료를 하니 구역장은 저에게 새 식구 전도를 위해 아카펠라 동호회를 만들었습니다. 장소가 없어 J대 예대 연습실에서 추위와 싸우며 준비했고 사람들을 섭외하며 친분을 쌓는 방법으로 동호회를 이용하고 활성화시켰습니다. 그러던 중 새 식구 형제가 신천지라는 것이 집에서 발각돼 전남 벌교의 이단상담소로 상담을 받으러 가게 되었습니다. 그로인해 저까지 집에 걸리게 돼 저는 집에서 15일 정도를 보호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3월 18일 아버지와 광주 외삼촌 집에 가게 되었는데 3월 19일 창립기념일 예배가 마음에 걸렸습니다. 결국 저는 집 앞에 있는 세탁소에 옷 좀 맡기고 오겠다고 거짓말을 하고는 교통카드와 옷을 들고 집을 나와 버렸습니다. 저는 집에서 나와 핸드폰을 끄고, 구역장을 만나러 갔고, 구역장은 '잘했다'며 반겨주었습니다.



저는 신천지 측 창립기념예배에 참석할 수 있다는 기쁨에 부모님의 심정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엄마의 간곡한 전화에 저는 집으로 다시 들어갔고, 다시금 10일 정도 보호를 받다가 4월초 어느 날 외삼촌의 차를 타고 전남 벌교 대광교회에 상담을 받으러 갔습니다. 그러나 제 거센 반항과 비웃음과 불량한 태도는 목사님을 힘들게 했고 저의 상담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시 집에서 1달간 보호를 받았습니다.



저는 폐인이 되었고, 부모님 얼굴이 보기 싫어서 밤과 낮을 바꾸어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 부모님께서 자고 계신 새벽에 편지를 써놓고 가출을 했습니다. 저는 바로 J대 후문에 있는 신천지 측 사무실에 가서 J대 부장과 간사, 영적 엄마를 만났고, 그들은 저를 격려했으며, 저에게 대광교회에서 받은 상담 내용이 무엇인지를 물어보았습니다. 저는 스스로 반증하면서 들었던 말씀들을 그들에게 쏟아냈고, 그들은 저를 청년회장에게 데리고 가서 보고를 하였습니다.



그 후 저는 신학원에 가서 담당 강사와 전도사에게 보고를 하고 재수강을 하게 되었습니다. 가출한 처음에는 너무 막막했지만 이후 과외자리가 들어오고 열매를 맺고, 살 집이 해결되고, 핸드폰이 생기고 모든 것이 다 해결되면서 내 선택이 맞았다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습니다. 그런 후 저는 안산에서 상담을 받고 말씀으로 이기고 나왔다는 ○○언니와 함께 신천지에서 간증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겪으며 저의 신천지에 대한 확신은 더욱더 굳어졌고 믿음은 커져만 갔습니다.



그렇게 저의 1년 반의 가출생활은 시작되었습니다. 집과 연락을 끊고 살다가 어느 날 이메일을 보았습니다. 2005년 가을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왔습니다. 저는 그것이 나를 집으로 불러들이기 위한 계획이라 생각하며 제 자신을 합리화시켰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알리지 않았습니다. 이듬해 2월말에 외할아버지까지 돌아가시는 일이 연달아 일어났습니다. 그때는 사실임을 알았고 그것을 같이 사는 부서 간사에게 말했지만 ‘가지 않는 게 좋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너무 죄송하고 마음이 아팠지만 모른척하며 가지 않았고, 복학하라는 말도 무시한 채 학교도 휴학을 하였습니다. 제가 신천지에서 3년 이상 있으면서 팀장에서 새 식구 팀장 전도특공대로 보내지기까지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신천지 사람들은 그 안에서 좋은 것만 보고 그곳이 죽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천국인줄로만 압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천국엔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장기 결석자들로 인해 심방만 담당하는 팀이 따로 있을 만큼 힘들고 험한 생활을 합니다. 청년회 사명자들은 시간만 되면 항상 야간 산행을 하였고, 저희 부서는 근처 공원에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항상 사명자들의 정신이 헤이해졌다는 이유로 기합 아닌 기합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체제 속에 베드로 지파 사람들은 항상 타 지파에 모범이 되었고, 2004년 신천지 전국체전 응원상을 받을 때는 외국에서 온 사람들에게 '저 사람들은 북한에서 온 지파입니까'라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그만큼 순종을 잘했고 잘 길들여진 짐승처럼 모든 것에 맹종하였습니다.



제가 지파 사명자 교육을 받을 때는 매일 성구 30개 정도를 새로 외워야 하며, 복음방 교수안을 입에서 줄줄 외울 수 있을 정도로 암기해야 했으며, 계시록을 한 장씩 정리하면서 계시록 전체 22장을 막힘없이 스피치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항상 두세 시간을 자면서 공부했고 사명자 교육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총회에서는 베드로 지파는 맛디아 지파를 만든 것처럼 이번엔 전도 특공대 100인을 뽑아서 총회로 보내어 전도에 미약한 타 지파를 도우라고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그래서 청년회 각 부서의 부서장들은 신청을 받았고, 신청자가 거의 없자 결국에는 부서장 권한으로 회원들을 차출하였습니다.



“잘 길들여진 짐승처럼 모든 것에 맹종하며 살았습니다.” 그때 저희 부서 부서장은 4명의 사람들을 뽑았고 거기에 저는 합류되어 두 달 가량의 교육을 받기 위해 합숙장소가 있었던 광주역 인근 신학원으로 제 거처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많은 청년들이 직장을 그만두고 살던 집을 처분하고 광주역 합숙장소로 모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제가 복음방으로 인도해주었던 새 식구 회원이 집에서 신천지라는 사실이 들통 났고 이로 인해 제 거처도 집으로 알려졌습니다. 마침 그때 서울에서 경찰을 하시던 외삼촌이 휴가차 내려오셔서 제가 신천지에 빠진 것을 알게 되었고, 삼촌은 휴가 기간을 제가 원래 살았던 곳에서 밤낮 잠복근무를 하시며 저를 찾으려 하셨습니다.



광주역에서의 두 달은 정말 죽을 것 같이 힘들고 괴로운 나날이었습니다. 하루에 40~50개의 성구를 외워야 했고 전도 특공대 교재 설명을 듣고 그날그날 2~3과씩 외우고 완벽히 스피치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것을 소화하지 못하면 그 다음날 어김없이 한두 시간의 기합을 받았습니다. 기합을 받는 것은 나이와 전혀 상관이 없었습니다. 전도특공대에는 청년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40~50대 되는 집사님들도 계셨지만 성적이 나쁘면 청년들과 함께 한두 시간을 똑같이 기합을 받았던, 그곳은 말 그대로 군대였습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이웃의 신고로 경찰이 찾아온 적도 있었습니다.



저는 기합을 받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했고 하루에 많이 자면 1시간, 평균 30~40분을 자면서 공부해 그 결과 기합을 거의 받지 않았습니다. 강사는 잠을 자라고 하면서도 밤이 되면 저희가 공부하는 곳에 와서 저희를 체크해 갔고, 그 때문에 저희는 잠을 더욱 잘 수가 없었습니다. 수요예배와 주일예배 때 졸게 되었으며, 항상 강사에게 ‘예배 때 졸지 말라’는 질책과 정신교육을 받게 되었습니다. 저희가 헤이해질 것 같으면 지파장이 와서 정신교육을 했고, 교육 때마다 조는 저희를 보고 신천지 측에서는 116명의 전도특공대원 모두에게 영양제를 놔주었습니다.



그렇게 두 달의 시간은 흘러갔고 잠을 자지 못함으로 간이 붓고 온몸이 붓게 되었습니다. 교육이 끝나고 저는 50명의 다른 대원들과 실전교육을 위해 군산으로 보내졌습니다. 거기에서도 비슷한 생활은 이어졌습니다. 저는 전체 서기 일을 맡았고, 60명에 대한 섭외자 600명가량의 리스트를 정리하면서 또다시 밤을 새면서 컴퓨터 앞에 앉아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다 일이 많아지자 서기 일을 분배하여 각 조별로 서기를 두었지만, 늘어나는 섭외자들을 정리하는 일은 여전히 많았습니다. 여전히 하루에 1시간 정도를 자면서 섭외자를 확보하기 위해 군산 시내 곳곳을 돌아다녔습니다. 하루 종일 구두를 신고 걸어 다니다 밤에 복귀를 하면 다리는 부어 있었고,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잠을 못자서 얼굴색은 점점 어두워져만 갔습니다. 두 주 정도 그렇게 살다보니 몸이 적응을 했고 정신력으로 버티다 보니 살만했습니다. 그리고 토요일은 헤이해진 정신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명목 하에 새벽 6시에 근처 학교 운동장에 가서 1~2시간씩 정신훈련을 받았습니다.



저희는 30~40대 신앙인만 전도하는 전도 특공대였습니다. 이유인즉 20대는 믿음도 없고 세상 욕심이 많으니 하지 말라는 것이었고 50대 이상은 일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저는 그들은 필요 없으니 하지 말라는 소리로 들렸습니다. 결국 신천지에 와서 열심히 일할 수 있는 자들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었으나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사무엘상 15장 22절 말씀을 통해 우리는 순종하였습니다. 군산으로 간 지 세 주째 전특대원들의 1차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계획했던 것들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에 대한 대가로 밤 12시에 복귀한 우리는 담당 강사의 명령에 따라 근처 학교 운동장을 20~30바퀴를 뛰어야 했습니다. 저희는 약간의 몸 풀기 후 2시간가량을 뛰게 되었고, 그렇게 죽을힘을 다해서 뛰고 난 후 숙소로 돌아와 씻고 잠자리에 들려고 하면 새벽 4시 정도가 되었습니다.



1시간을 자고 난 후 아침에 교육을 받으며 다시금 하루를 시작하였습니다. 길을 가다가 괜히 ‘집사님!’ 하고 외쳐보기도 하고 옷에 없는 먼지를 털어주며 친절을 베풀고 한 사람을 찍어서 계속 따라다니며 기회를 엿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저희 조원 중 한 명은 경찰서에 잡혀가서 조사를 받기까지도 했습니다.



전도특공대원 모두는 기성 교회에 들어가 추수꾼으로 가장하여 활동하였고 저 역시 4군데의 교회에서 추수꾼으로 활동하였습니다. 4군데를 뛰기 위해 많은 거짓말을 했고, 각각의 교회에 거짓이 들통 나지 않기 위해 교회마다의 내 콘셉트에 대해 적어놓고 갈 때마다 숙지하고, 완벽한 연기를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렇게 활동하면서 섭외자 복음방을 하게 되었고, 추석이 되어 휴가를 받아 광주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때를 전후로 하여 같은 부서에 있었던 ○○자매가 가족에게 돌아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자매를 잘 알았던 저로서는 ‘○○자매가 믿음의 부족도, 말씀에 대한 불신도 아닌 가족에게 이기지 못해서 돌아갔구나!’ 생각했고 ‘절대 나는 가족에게 매이지 말자’라고 생각했습니다.



“4군데의 교회에서 추수꾼으로 활동하였습니다”



추석휴가를 보내고 다시 군산으로 복귀하는 도중 도로가 막혀 버스가 늦어졌고 복귀시간에 10분 정도를 늦게 되었습니다. 이 때 담당 강사는 저희들을 군기가 빠졌다면서 복귀 첫날부터 기합을 주었습니다. 그렇게 군산에서의 10월이 시작되었고, 그와 동시에 저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도 시작되었습니다. 10월이 되자 군산에 있는 모든 교회들이 비상에 걸렸고, 신천지에 대한 경보에 모든 사역자들이 긴장의 끈을 놓고 있지 않았습니다. 4~5주 정도 안에 교회에 처음 온 사람들은 모두다 의심을 받게 되었고, 교회마다 신천지 색출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다 저와 함께 추수꾼으로 활동하던 자매와 주일 예배를 마치고 복귀하는 도중에 누군가 뒤에서 미행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고, 우리는 그들을 따돌리기 위해 옆에 보이는 아파트로 들어갔습니다. 당연히 미행하고 있었던 형제도 같이 따라 들어왔고 아파트 한 동 앞에서 저희가 보이지 않자 그 동 앞에서 주변을 살피다가 사라졌습니다. 그렇게 미행을 따돌리고 아파트를 나오려고 할 때 아파트 주민 중 한명이 우리를 보고 도둑으로 몰았습니다. 그 이유는 4주간 여섯 집이 털렸는데 우리는 모르는 사람이고, 도둑들이 하는 행동과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경찰이 왔고 우리는 연고도 없는 군산에 왜 왔느냐는 질문부터 여러 곤란한 질문에 대답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국에는 신원조회를 하게 되었고 제가 있는 곳이 집에 알려지면서 부모님께서는 군산으로 올라오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흰 이미 풀려나서 군산 지교회에 있었고 부모님은 허탈한 마음으로 집으로 내려가시게 되었습니다. 한 주가 가고 부모님께서는 제가 추수꾼으로 있었던 교회의 도움으로 신천지 측 군산 지교회를 찾았습니다. 부모님은 광주에서 기자생활을 하는 외삼촌과 경찰인 삼촌, 군산 경찰의 도움을 받아 저를 군산교회에서 끌고 나오셨습니다. 강사는 처음에는 저를 숨겨줄듯 하더니 결국은 저를 내주었고, 어차피 기대하지 않았던 저는 부모님을 따라 외삼촌 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저를 보신 외숙모는 ‘저게 사람 얼굴이야? 곧 죽을 사람 얼굴이다’라며 우셨습니다. 저는 1년 반 만에 처음 보는 부모님께 반갑게 인사하기는커녕 싸늘하게 ‘안산가려고? 가자!’라고 말하면서 차 속에서 안산에 올 때까지 계속 잠만 잤습니다. 그때는 ‘드디어 때가 되었다. ○○언니도 상록교회를 갔다 왔는데 이번만 더 버티자. 부모님을 포기하게 만들어야겠다!’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부모님께서는 광주에서 사역하시는 분으로부터 ‘안산에 가면 바로 상담할 수 있다’는 말만 믿고 올라오셨다가 ‘상담을 받으려면 적어도 내년 3월까지는 기다려야 한다.’는 말을 듣고 한동안 말이 없으셨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저는 시간을 더 벌수 있겠구나 생각했고, 어머니는 제게 ‘목요일 날에 다시 오자’ 하시며 저에게 ‘한 달만 들어보자’고 하셨습니다. 목요일이 되고 상담을 받으러 올 사람이 못 오게 되자 저는 혼자서 상담을 받게 되었습니다. 첫날부터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한 달을 버티기 위해 몸에 힘을 다 빼고 최소한의 에너지만을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당연히 버텨야 한다는 생각에 음식도 잘 먹었습니다. 저는 최대한 상담자들을 짜증나게 만들었고, 무시했고 비웃었습니다. 둘째 날 감옥에 있어야 할 진용식 목사님이 제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약간 의아했지만 그것이 저의 신천지 신앙을 흔들지는 않았습니다.



상담 내내 일관된 태도로 사람들을 대했고, 웃지도 않았고 말도 하지 않았고, 청년들이 교제하러 다가오면 잠을 자거나 자리를 피했습니다. 목사님 앞에 성경책을 던지는가 하면 장영주 전도사님께는 축사하라고 대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이러한 행동을 한 저를 항상 따뜻하게 맞아주셨고, 항상 제 영혼에 대해서 걱정해주셨습니다. 솔직히 저는 신천지에 있을 때 말씀이 많이 바뀌어간다는 것을 알았고, 몇 가지는 틀린 것도 있다는 것을 은연 중에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외에 많은 말씀들이 맞았고, 신천지가 틀렸다는 것은 상상하지 못할 일이었기에 틀린 말씀들을 설명해주어도 저와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만큼 세뇌가 잘 되었고, 전도특공대에서 몸에 익힌 모든 것들이 저를 더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다 두 주째 되는 금요일 청년들과의 교제를 통해 신천지 측에 많은 거짓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날로 어머니께 개종하겠다고, 말씀 듣겠다고 했습니다. 다음날 주은혜 집사님을 통해, 확신했던 신천지의 실상이 틀렸다는 것에 더욱 충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저의 태도는 돌변했습니다. 이러한 저를 보고 목사님은 당황해하셨습니다. 제가 ‘속았다’는 말을 하자 장영주 전도사님은 매우 좋아하셨고 목사님께서도 기뻐해주셨습니다. 저는 그날 바로 구원론까지 듣게 되었습니다. 구원은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고 은혜인 것이라는 말씀에 저는 한동안 울었습니다. 그동안 나는 열매 맺어서 비유를 많이 알아서 구원 받으려고 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신천지에서 잃어버렸던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눈물을 다시 찾게 되었습니다. 3년 동안 우상 숭배했던 저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큰 계획 속에서 다시 건져 주셨습니다. 주님께 저의 죄를 회개하고 감사드립니다. <뉴스 엔 조이>



경기도 가평 평화연수원에서 신천지 이만희 총회장, 목회자 초청 집회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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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9-12-16 07: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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