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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 영지주의란 무엇인가? - 국제신대 라은성 역사신학 교수 학생과의 대담에서
  • 기사등록 2018-02-22 23: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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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신대 역사신학 라은성 교수 국제신대 라은성 교수의 재미있게 배우는 교회사학교 23
“안녕하세요. 날씨가 좋죠? 일주일 동안 잘 지내셨어요? 저도 바쁘게 지냈습니다. 그런데 토요일마다 여러분들을 만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매우 기뻤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공부에 임하니 저 역시 가르치는 자로서 열심히 재미있고, 흥미 있게 가르쳐야겠다고 마음먹습니다.”

1.1.1. 이단 정의

“오늘의 주제는 지난주까지의 주제와 연관된 것이지만 새로운 주제가 될 것입니다. 바로 ‘이단들’이라는 주제입니다. 이단들을 배우면서 우리는 먼저 ‘이단’이라는 단어에 대한 정의를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이단과 관련된 단어는 ‘이단’, ‘이단자’, 그리고 ‘이단성’, 등으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영어로는 각각 ‘heresy’, ‘heretic’, 그리고 ‘heretical’입니다.

‘이단성’이란 누구든 가질 수 있습니다. 바른 교리와 성경 진리를 잘못 알고 있는 경우라든지, 아니면 바로 알고 있어도 잘못 서술하게 되면 이단성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누구든 이단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려운 ‘삼위일체론’을 제대로 알지 못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알고 있어도 어설프게 알고 있기 때문에 잘못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단성이 있다고들 합니다.”

“그렇다면 잘못 되었다고 말한다는 것은 곧 ‘바른 것’과 ‘절대적 기준이 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죠. 그 바른 기준을 가리켜 ‘정통’(orthodox)이라고 합니다. 무엇이 정통인지는 무엇이 이단인지를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단이 있은 후 정통이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연못에 가서 얼굴을 비춰보는데 비치는 모습이 물결로 인해 일그러져 보일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모습이 일그러진 것은 아니죠. 비친 얼굴이 먼저가 아니라 단지 비친 모습으로 비로소 나를 알게 되는 것 뿐이죠. 이단과 정통과의 관계가 이러합니다. 이단으로 정통을 비로소 보다 정확하게 알게 됩니다. 본래부터 정통이 있었습니다. 이단이 생겨나니까 구별하기 위해 정통을 규정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리고 이단성을 가진 한 개인, 한 개인이 무리를 짓거나, 파당을 짓거나, 또는 분당하게 되면 그 무리를 가리켜 ‘이단’이라고 정죄합니다. 그 정죄는 개인이 하거나 지역교회가 하는 것이 아니라 ‘총회’가 하게 됩니다. 요즘은 여러 총회가 있으니까 혼동스럽겠지만 원리는 그렇습니다. 자신이 속해 있는 교단 총회에서 이단성을 가진 무리들을 가리켜 이단이라고 정죄하게 됩니다. 총회에서 정죄 받은 이단에 속한 개인을 가리켜 우리는 ‘이단자’라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이단성이 곧 이단이 될 수 있고, 이단에 속한 자가 곧 이단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총회가 무엇을 두고 이단이라고 하느냐는 기준을 알게 되면 우리가 바로 걸어가게 되는 정통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사는 곧 이단의 역사인 동시에 정통의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동전의 양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단의 역사는 곧 정통의 역사입니다. 흥미 있죠?”

“교수님! 질문이 있는데요. 흔히들 이단(異端)은 한자로 표현해서 ‘모두 같은데 끝이 다르다’고 하잖아요? 실제로 그런가요?”

“예~,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꼭 끝이 다르다는 것이 아니라 또는 어느 부분만 다른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다를 수도 있고 전체가 다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께서 지금 구체적으로 그림을 그릴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단이라고 하면 한국교회의 이단들을 연상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아무튼 초대교회에 일어났던 이단들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무엇을 두고 이단성이 있다고 하느냐를 알기 위해서는 이단성을 갖도록 했던 영지주의에 관해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이단성을 일으키는 것이 바로 영지주의이기 때문입니다. 앞에서도 영지주의에 관해 가끔씩 말씀을 드린 적이 있는데 여기서는 보다 자세하게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동시에 여담으로 말씀을 드리자면 지금의 ‘포스터 모더니즘’, ‘뉴 에이지 운동’ 은 바로 영지주의 부활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신약성경 저자들도 ‘영지주의’를 경고했을 뿐만 아니라 1~2세기 교부들, 즉 변증가들도 영지주의에 관해 신랄하게 비판하고 경고하고 그들에 반대하여 많은 글들을 남겼습니다. 영지주의는 초대교회에만 국한되지 않고 교회사 2,000년에서 언제나 모습을 바꾸어 기독교 사상에 악영향을 크게 끼쳐 이단성을 갖도록 했습니다. 영지주의 자체는 이단이라고 볼 수 없죠.”

1.1.2. 영지주의 정의

“‘영지주의’의 정의에 관해서는 먼저 ‘45차 한국복음주의 신학회 발표회’에서 발표된 ‘파코미안 수도원운동에 끼친 영지주의’라는 논문에서 자세하게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의 글을 이상영씨가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영지주의는 신비하고 비밀적인 지식을, 또는 ‘영지’(gnosis)를 통해 구원이 이뤄진다는 종교적 철학적 이원론을 철저하게 표방하는 운동이라고 한다. 이 운동은 영지주의자 발렌티우스(Valentinus, c. 105~c. 165)에 의해 설립된 로마학파와 알렉산드리아 학파들이 2~3세기의 그레코-로만(Greco-Roman) 세계에 그 번영을 나타내면서부터 알려지게 되었고, 그 이후 이 운동은 기독교에 큰 충격을 준 신비적 종교운동이 되었다. 이 운동이 번영했던 시기는 교회교부들이 ― 이레니우스(ca. 120~203), 히폴리투스(d. 235), 터툴리안(ca. 150~160~ca. 220~240) 등이 ― 활동했던 시기였다. 그래서 그들은 영지주의 위협을 느끼고 간과하지 않았던 것이다. 교부들이 초긴장을 하며 대응했던 이유는 대부분의 영지주의자들이 기독교인임을 고백한다고 가정하면서 초대교회에 정통 기독교와는 너무나도 다른 신앙을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교수님! 영지주의에서 말하는 ‘영지’란 무엇인가요?”라고 글을 읽던 이상영씨가 묻는다. “글쎄요... 처음에는 저도 ‘영지버섯’을 연상했거든요. 혹시 영지버섯을 연상하신 것은 아니시요?” 모두들 “하하하” 하며 큰 소리로 웃는다.

“계속하여 그 글에서 이렇게 설명하는데 그 다음 문단을 읽어보시면 답이 나올 것입니다. 이상영씨가 계속하여 읽어주시는 것이 좋겠네요.”

위에서 언급한 ‘영지’의 의미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지식보다는, 산만하고, 분석적이고, 추상적인 지식이라기보다는, 지성적인 이해를 넘어선 실재에 대한 통찰력을 의미한다. 신비한 영역이나 알 수 없는 영역에 대한 지식이다. 신비한 영역에서 오는 신적 존재의 ‘섬광’(spark) 또는 ‘씨앗’(seed)은 전적으로 악한 물질세계에 주어졌다. 그 섬광들 또는 씨앗들은 인간의 몸에 갇혀 있다. 하지만 ‘신비한 지식,’ 즉 ‘영지’로 다시 일깨워진 신적 요소는 사람들을 초월적 영적 영역에서 적절한 보금자리를 갖도록 한다.

“그래서 영지주의자라고 할 때는 영지를 소유한 자들, 즉 신비한 지식을 소유한 자들이라고 하지요. 이러한 영지를 소유하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그 영지를 통해 극상의 존재이신 하나님, 최고로 거룩하시고 존귀하신 하나님과 연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구원으로 봅니다. 완전한 상태에 이르기를 원하지요. 하지만 우리 정통신앙에서 말하는 구원은 에베소서 2:8~9에서 말씀하시는 것에서 잘 알 수 있죠 영지주의가 말하는 구원과 우리는 다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지식, 또는 어떤 특별하고 신비한 지식, 즉 영지를 가지는 자가 영적으로 성숙했다는 것도 아니고 그것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하는 것과 같은 것을 구원이라고 성경은 결코 말씀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지주의자들은 대체적으로 엘리트 의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신비한 지식, 즉 영지를 가졌으니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며 스스로 엘리트의식, 특권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중세교회인 로마 카톨릭에서 가졌던 ‘교권주의’처럼 말입니다. 자신들만 무슨 특별한 것을 깨닫고 있고 소유하고 있다고 하는 특권의식을 가지면서 특권층을 형성하는 교권주의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영지주의자들은 세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 ‘영적인 자들’(pneumatic)인 영지주의자들, 또는 구원을 확신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영의 영향 아래 있기 때문에 구세주를 인식하고 그에게 일치한다. 둘째, 완전한 영지주의자들은 아니지만 지식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로 ‘심령자들’(psychic)이 있다. 이들은 첫째와 둘째 부류의 사람들 사이에서 주저하지만 구세주에게 가까이 가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셋째, 구원을 받지 못하는 자들인 ‘물질인들’(hylic)은 물질의 지배를 받고 있다. 그래서 영지주의자들은 금욕을 지나치게 행하여 영의 지배를 받으려고 노력한다. 이들을 구분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열매를 통해 알 수 있다.

“교수님! ‘영지주의 정의’를 내리시기 전에 말씀하시기를 ‘기독교 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하셨잖아요?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입니까?”

“좋은 질문입니다. 이주영씨!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자세한 설명을 알기 위해서 윌리엄 커닝함이 쓴 『역사신학』 상권의 4장 ‘사도적 시대의 이단들’을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교수님, ‘역사신학’이라는 책이 어느 출판사에서 나온 것인지 말씀해 주시겠어요?” 이주영씨가 계속하여 물었다.

“예, 바로 이 책인데요. 그리심에서 나온 것으로 무려 800페이지 이상이 되는 두꺼운 책이면서 가격도 무려 3만원에 이릅니다. 그런데 매우 어려운 책이지요.”

“교수님, ‘역사신학’이란 것이 무엇을 연구하는 과목입니까?”

“신학의 기본은 성경신학입니다. 성경신학을 근거로 하여 조직신학이 세워집니다. 그런 후 사회와 역사를 바라보면서 그 신학이 어떻게 발전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역사신학’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교회사 + 조직신학’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영어로서는 ‘Historical Theology’ 라고도 하고 ‘History of Theology’라고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신학의 역사’ 또는 ‘신학사’라고도 하지요. 조금 쉬었다가 강의를 계속할까요?”

휴식 시간을 이용하여 성민은 도서관으로 가서 책을 빌려 읽려고 곧장 도서관으로 찾아갔다. 그리고 교수님이 말씀하신 부분을 읽어보았다.

처음 2세기의 이단적 체제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사용된 이름은 영지주의(Gnosticism)였다. 어떤 의미에서는 3세기에서도 존재했다. 3세기에 이르러서는 특별히 마니교(Manichæsm)가 매우 주요한 이단으로 떠올랐다. 영지주의는 인류 역사에 흥미를 주는 장을 형성하고 인간성을 연구하는 자와 인간성의 능력과 경향들을 철학적으로 연구하는 자에게 어떤 유용하고 교훈적인 훈계를 주기도 한다.

독신주의와 수도원제도는 영지주의 원리들이 교회에 가장 명료하고 완전하게 발전되었던 실례였다. 교리들의 과정과 관계를 추적하는 것을 흥미롭게 여기는 사람들은 초기에 퍼져있었던 다른 견해들과 개념들에서 후에 교황제로 완전히 발전되어 나갔던 것을 추적해나가기를 원했다. 이런 사람들 가운데서 영지주의 원리들은 발전되어 나갔다. (인터넷에서 그대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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