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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 “칭의와 성화, 구별할 뿐 분리할 수 없다”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지상강좌]

편집국|2017-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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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재성 박사. 
1) 십자가를 재발견하다.

은혜의 교리는 그저 오래 동안 잊혀져 있던 주제들 중에서 하나를 재발굴했다거나, 왜곡된 교리를 재해석한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은총으로만"은 종교개혁의 신학사상을 전체적으로 규정짓는 근본적인 원리이다. 루터가 자신의 내면적인 죄와 싸우면서 객관적인 구원의 증거들에 대해서 고뇌할 때에, 하나님의 은혜가 죄의 권세를 부수고 정죄를 깨끗이 없애버림으로써 죄인에게 마음의 평온을 내려주시는 것을 확실하게 터득하였다.

은혜를 주시는 근거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위에서 흘리신 고결한 보혈로 대속적 형벌을 당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십자가에서 나타났다. 루터는 구원의 방법을 찾아서 온갖 노력을 다 해보았지만 아무런 확신을 갖지 못하다가, 십자가의 신앙을 터득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야말로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난 결정체였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종교개혁자들에게 충분한 위로가 되었기에, 수많은 종교개혁자들이 고난과 핍박을 견디어 냈고 박해를 당하다가 순교하였다. 이름없이 고통 속에서 신음하면서도, 자신들에게 주어진 길이라고 생각하면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십자가와 부활의 소망이 힘을 주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루터가 강조했던 십자가 신학(theology of cross)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그거야말로 기독교 신자라면 당연히 믿어야할 기본적인 내용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런 주장을 내놓고 논쟁을 하다가, 교황청과 황제로부터 동시에 이단으로 정죄를 당했다. 현대 복음적인 교회에 출석하는 성도들은 모두 다 예외 없이 십자가를 믿는 신앙인들이다. 1518년 4월에 "하이델베르크 논쟁"에서 루터가 처음으로 십자가의 신학을 토론 주제로 삼아서 강력하게 설명했다. 사실 요즘에 이런 설명을 듣게 되어지면, 다소 어리둥절할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은 복음의 핵심으로 십자가를 믿는 신앙이 당연한 일인데, 스콜라주의와 수도원 제도에 빠져 있던 16세기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그야말로 경이로운 주장이었던 것이다. 필자는 루터가 십자가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는 글을 접하면서, 지극히 상식적인 소리를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이 주제에 대해서 박사학위 논문들이 많이 나왔는가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지금 종교개혁이 오백주년에 이르게 되니까, 그가 발표한 것들에 대해서 잊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이 물려준 신앙의 유산을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루터가 하이델베르크 논쟁에서 제시한 십자가 신학은 마치 새로운 보물을 가져다가 성도들에게 나눠준 것과 같았다. 무지한 상태로 무작정 로마 교회에 끌려가고 있는 성도들에게 성경을 통해서 깨달은 바, 하나님이 하신 일들 중에서 가장 경이로운 깨달음을 제시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지극히 어리석은 방식으로 일하고 계신다.

무지한 성도들을 도와주려는 목회적 동기에서, 강요된 신앙에 따라서 무작정 휘들리고 있던 당시 성도들에게 루터는 로마 가톨릭에서 가르치던 스콜라주의 신학의 왜곡들을 조목조목 비판하였다. 루터가 비텐베르크 대학교에서 졸업생을 위한 토론을 위해서 1517년 9월 4일에는 97개 논제들을 작성했다. 이 논제들은 주로 아리스토텔레스, 이성과 의지에 기초를 둔 공로주의와 스콜라주의 신학을 맹렬하게 비판한 것이다. 이어서 10월 31일에 발표한 95개 조항은 면죄부 판매의 부당성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점차 논란이 커지면서, 루터는 1518년 4월 11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28개조를 발표하고 토론에서 승리했다. 그 중 20번째 항과 21항에서 루터는 "십자가 신학"을 강조했다. 루터는 "오직 십자가만이 우리의 신학이다"(Crux sola est nostra theologia)라고 주장했다. 그 반대 개념은 영광의 신학이라고 21항목에서 설명하였다:

"영광의 신학자는 악한 것을 선하다 말하고, 선한 것을 악하다고 말하는 자이다. 십자가의 신학자는 사물을 실제로 있는 그대로 말한다. 이것은 분명하다. 그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역시 고난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는 고난보다 행위들을, 십자가보다 영광을, 연약함보다 권세를, 어리석음보다 지혜로움을, 나쁜 것보다 좋은 것을 선호한다. 바로 여기에 바울 사도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들이라고 일컫는 자들이 존재한다(빌 3:18). 어떤 경우에도 그들은 십자가와 고난을 증오한다. 하지만 그들은 선행들과 그것이 가져다주는 명성을 사랑하기 때문에, 십자가의 선함을 악하다고 부르고, 선행의 부끄러움을 선하다고 부른다. 그러나 이미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오직 십자가와 고난 속에서 발견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러기에 십자가의 벗들은 십자가를 선하다고 하고 선행을 악하다고 말하는데, 이는 십자가를 통하여 선행들이 허물어지고 공로를 통해서 세워진 "옛 아담"이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미 고난과 치욕을 통하여 완전히 비워지고 낮추어짐으로써 인간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요 선행들도 우리에게가 아니라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라는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사람이 자신의 선행들을 근거로 우쭐해지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2) 십자가 신학에 담긴 중요한 교훈들에 대해서 구별해 보자.

첫째, 인간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실 때에 위대한 영광과 큰 권능을 수반해서 승리를 드러내실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십자가는 그 정반대의 계시이다. 마태복음 16장 21절에는 주님께서 고난을 당하시고, 죽임을 당하시는 수동적인 모습이 반영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수치스럽고 연약하기 그지없는 십자가 위에서 죄인의 몸으로 죽으시는 모습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셨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나타나는 하나님이 아니다. 모든 성도들은 겸손하게 배워야만 한다. 인간은 연약하고 어리석으며 비천하고 낮은 사람들을 천하게 취급한다.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에서 십자가의 의미가 매우 중요하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고 살아가라는 교훈이요, 겸손한 생활 방식이다. 그리스도는 죽기까지 순종하시고자 인류에게 찾아오신 예수님께서는 먼저 낮아지셨다. 십자가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의 원천이요, 신앙인의 삶에서도 모범이 되는 행동양식이다.

둘째, 이성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모순이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데 있어서도 이성을 의존하여 잘못된 생각에 빠져 있는 것이다. 이성은 장엄하고 거대하며 영광스럽고 권능이 충만한 분으로 나타나실 하나님을 기대한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께서는 슬픔, 비통, 비극, 절망, 연약한 상태로 자신을 드러내셨다. 하나님께서는 온유한 모습으로 이성이 가진 한계를 지적하신다. 사람들은 성공과 재물과 건강이 하나님의 은총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고난이야말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의 모습이라고 가르친다.

건강과 성공, 재산과 명예, 출세와 야망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오직 고난과 실패로 다가올 뿐이다. 많은 사람들은 부끄러운 일도 서슴지 않고, 오직 자기만족과 자기 영광을 위해서 발버둥을 치고 있다. 땅위에 쌓은 재물과 지위가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하나님의 은혜이자 신앙의 모델이라고 강력하게 증거하여야 한다. 세상 사람들의 모든 욕망들은 다 어리석은 것이라고 전도서에서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셋째,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서 신령한 축복을 받기 원한다면, 먼저 인간의 주도권을 포기할 것을 요구하신다. 십자가의 고난, 연약함, 치욕을 당하심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심으로서 하나님에 대해서 가졌던 선입견을 포기하도록 요청하시는 것이다. 그래야만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서 배우게 된다.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로 말미암아 큰 영향을 받는다. 고난 당하시고 십자가에 넘겨지신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고난을 통해서 영광으로 나아간다(행 11:26).

이제 십자가의 신학은 소망의 신학이다.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과 고난의 진정한 목표는 부활이요, 승천이며, 재림에 있다. 현대 교회는 십자가 신앙을 회복함과 동시에, 부활과 승천, 성령강림과 교회설립, 재림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서 더 큰 비전을 바라보면서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3) 칭의와 인간의 공로

중세시대 구원론에서는 사람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를 다루는 것이었다.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과의 격차가 너무나 크고, 엄중했기에, 중세교회에서도 정확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가운데, 마치 새로운 골칫덩어리로 등장한 루터가 여러 논쟁에서 성경적 신학 사상을 제시하자, 새소식이 순식간에 독일, 스칸디나비아 북구 유럽, 영국 등으로 널리 확산되어 나갔다.

우리는 루터가 성경을 강해하는 동안에, 특별히 칭의론 혹은 칭의 교리에 대해서 깊은 깨우침을 가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루터의 칭의교리는 1515년 겨울부터 1516년까지 비텐베르크 대학교에서 지속된 로마서 3장 28절에 대한 강해에 담겨있는데,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다는 것은 결국 사람이 의롭다하심을 얻는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려야한다고 우리는 주장하고, 인식하고, 확증하여야 한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율법의 행위로부터 떠나서 믿음으로 얻는 것이며, 율법을 지키는 행동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란 하나님의 율법 앞에서 죄인임을 자각하였고, 결코 인간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의로움을 획득할 수 없음을 절감했다. 자신이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의로움이란 인간의 내부에 들어있는 것이 아니며, 사람의 깊은 인격 속에다 쌓아가거나 성취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다.

중세시대에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 사람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집중했었다. 그 이유는 상당히 오랫동안 일부 어거스틴의 저술들에 의존하면서도, 다소 명쾌하지 않은 선행과 공로사상이 큰 세력을 얻었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의 칭의론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로마서 1장 17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의"에 대한 설명에서다. 그는 이 구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에서 의로움이 있기에 외부적으로 드러나는 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의롭다고 하심으로서 드러나는 것이라고 보았다. 어거스틴이 풀이한 바에 따르면, 죄인의 칭의는 하나님께서 믿음을 통해서 주시는 값없이 베풀어주신 선물이다. 어떻게 이런 의롭다하심이 일어나는가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보충하였다:

"한마디로 말로 하자면, 행위의 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음의 법에 의한 것이다. 기록된 문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이다. 행동의 공로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은혜에 의한 것이다."

어거스틴은 값없이 거저 주시는 믿음에 대해서 강조하였다. 칭의란 외부적 선언만이 아니라, 죄인의 변혁도 포함된다는 어거스틴의 주장도 있었다.

헬라어를 라틴어로 번역하면서 성경본문에 포함된 기본적인 개념이 변질되었다. '의롭게 하다'는 뜻은 헬라어 "디카이오운"(dikaioun)이라는 단어가 라틴어로 번역되면서, "유스티피카레"(iustificare)로 바뀌었는데, "의롭게 만들다"는 의미로 일부 재해석 되었다. 이러한 기본 개념에 따라서, 중세 스콜라주의 신학은 인간의 의지를 강조하는 펠라기언주의 혹은 은총과 의지가 합력하여 성취한다는 반펠라기우스주의를 만들어냈다. 신인협력설은 결국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기 보다는 사람이 의를 쌓아가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졌다.

초대교부들을 연구한 데이빗 라이트 교수는 어거스틴의 칭의론 부분을 보다 상세하게 연구하여 발표하였다. 어거스틴의 문장들을 살펴볼 때에, "내가 의롭게 하다"는 "유스티피카티오"(justificatio)라는 단어에 대한 설명이 다소 후대의 학자들처럼 명쾌하지가 않았다고 주장한다. 어거스틴에게서는 의롭다는 것이, 성도의 내적 변화냐 혹은 하나님으로 나오는 외부적인 선언이냐를 구별할 만큼 명쾌하게 제시한 것은 없다는 것이다. 펠라기우스를 논박하는 문서에서 어거스틴은 "불의하는 자들은 반드시 의롭게 되어져야만 하는데, 그렇게 되기 위하여 의롭게 되어야 하는 것이고, 합당하게 법을 사용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로마서 1장 17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성도들에게 제공하여 주심으로써 의롭다고 만드신다는 것이다 (justos facit). 시편 3:8절에 대한 해석에서도, 어거스틴은 두 가지 내용을 모두 다 한 문장에 넣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불의한 자를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것이다"(qua induit hominem cum justificat impium). 하나님의 의로움을 은혜의 선물로 주시는 방법을 통해서 우리를 의롭게 만드셨다. 하나님의 의로움은 율법의 개념을 통해서 가르쳐주실 뿐만이 아니라, 성령의 선물을 통해서 베풀어주셨다는 것이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수단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다. 이 신앙은 마치 물길과 같아서, 하나님의 은혜가 성도에게 흘러들어오는 통로가 된다. 루터는 신앙을 부부 사이의 혼인서약과 같은 이미지로 풀이했다. 칼빈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한 견고하고도 분명한 지식이라고 규정했다. 의롭다하심을 얻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바에 따르는 것이지, 우리가 가진 신앙에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이 신앙마저도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리스도의 피는 외적인 기초이고, 신앙은 개개인에게 주는 내적인 수단인데, 모두 다 하나님의 은혜로 제공되었다.

적어도 어거스틴에게는 사람이 수동적으로 은혜를 받아서, 그 후에 의롭게 되어지는 노력을 하므로써 하나님에게서 인정을 받는다는 구절이나 개념은 찾아볼 수 없다.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가 시행된다고 보았다. 반펠라기우스주의라고 볼 수 있는 여지란 전혀 없다는 의미이다. 선행을 하면 은혜를 얻게 된다는 개념은 전혀 없다. 정반대로 되어있음을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의 기준을 채우기 위해서 성도가 먼저 스스로 공로와 선행을 통해서 은혜를 채워나가는 과정을 중시하였다. 그러한 칭의론의 핵심은 로마 가톨릭 교회가 제공하는 일곱가지 성례를 통해서 은혜가 주입되어진다고 해결책과 연계되어졌다.

루터의 칭의론 이해는 1514년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시점을 맞이하였다. 그는 사람의 노력이 중요한 요소로 취되어지던 스콜라주의 신학을 버리고, 칭의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혁신적인 변화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 이전까지, 기본적으로 루터는 신학파 (via moderna)의 저술에 영향을 받았었으나,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의로움"이라는 것은 사람에게는 수동적인 성격으로 이해해야만 성경을 제대로 풀이한 것임을 터득하게 된 것이다.

1515년과 1516년 사이에 로마서 강해를 하면서, 루터는 어거스틴의 은총론을 재발견하면서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의 가르쳐 온 인간의 공로사상을 버리고 새로운 해결방안을 찾게 되었다. 결국 루터는 "의롭게 되다"는 동사는 "하나님과의 의로운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게 되었다. 물론, 은혜를 입은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음으로 인해서 주어지는 화목의 관계이다. 중세교회에서는 그 누구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방법에 대해서 시원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하였다. 루터는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서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었다.

죄의 실체는 분명히 사람들의 양심적인 가책에서 드러난다. 하지만 죄의 삯인 사망에 대해서 용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 역시 실체가 있다. 정죄가 아니라 용서와 의롭다하심이 주어진다. 그리스도의 보혈은 인간의 죄값을 대신해서 형벌을 받으신 것이지만, 망한 것이 아니다. 도리어 그리스도는 승리자가 되신 것이다! 이것이 루터가 주장하는 승리자 그리스도라는 대속의 교리이다.

4) 죄의 사면과 의로움의 전가

종교개혁은 예민하고 냉철한 신학자들의 지도력에 의해서 로마 가톨릭의 문제점들과 오류들을 깨닫고 새롭게 성경적 신앙을 회복하고, 사회 전체적으로 그런 확신들이 전파될 수 있었다.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사상이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정치적인 변화를 염원하면서 더 나은 생활을 추구하려던 사람들에게 부응하는 해답이 신앙의 중심지인 교회로부터 주어졌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사회질서를 염원하던 성도들의 갈망을 받아주면서도, 가장 적절하게 감동을 주는 대중적 지도자들이 바로 개혁신앙을 토해내던 설교자들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이 남긴 저술들에는 핵심적인 기독교의 진리가 새롭게 잘 정리되어져 있어서, 누구든지 쉽게 접할 수 있었다.

칼빈의 핵심적인 성경연구가 담겨있는 「기독교강요」는 경건의 대전이라고 불리운다. 1536년 초판은 성경의 기초적인 가르침을 요약해 놓은 소책자였는데, 1559년 최종본에서는 거의 모든 주제를 망라하는 교과서로 확장되었다. 가장 순수한 믿음의 내용을 포괄하겠다고 마음에 다짐을 거듭한 칼빈은 교회의 목사이자, 교사로서의 소명의식을 강렬하게 느끼면서 이 책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종교개혁자들의 사상을 총체적으로 집약한 신학적 교훈집이며, 간추린 성경의 교과서이자, 간략한 지침서로서 모든 성도들과 목회자들에게 제공되었다. 종교개혁이 낳은 최고의 걸작품이다.

총 80장으로 확장된 「기독교강요」 최종판에서, 칼빈이 가장 많은 분량이 할애된 주제는 칭의 교리이다. 그만큼 구원론의 핵심을 이루고 있던 교리이자, 루터의 유산을 물려받은 칼빈의 연구가 돋보이는 부분이다. 칼빈은 다섯 장에 걸쳐서 칭의의 개념과 믿음과의 관련성, 성화와의 구별됨을 명쾌하게 제시하였다: "칭의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자신의 호의로서 의로운 사람들이라고 받아주심이다. 그리고 칭의는 죄의 씻음과 그리스도의 의로움의 전가라는 요소로 구성되어진다."

칼빈은 칭의 교리를 뒷받침하는 중요성경 구절들을 제시하였는데, 로마서 4:6-7, 5:19, 그리고 고린도 후서 5장 18-21절이다. 성도들은 값없이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전가받는다는 칼빈의 강조는 어거스틴에게서는 전혀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았던 개념이었다. 칼빈은 의의 전가를 가능하게 만드는 그리스도와의 연합교리를 견고하게 강조하였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과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은 결코 동일하지 않음을 강조하였다. "사람들이 자유의지의 능력에서 나오는 무엇인가를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에 덧붙이고자 아무리 애쓸지라도 결국 그것은 좋은 포도주를 더러운 물로 희석하는 것처럼, 그저 오염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칭의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서 은혜로 받아주시는 것 뿐이다. 성도가 노력으로 세우는 그 어떤 공로나, 도덕적 변화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5) 은혜의 표지들과 훈련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은혜만을 근거로 삼고, 믿음을 통해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고 가르쳤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철저히 은혜를 입은 결과이자, 그 은혜를 표현하는 삶의 과정이다. 은혜를 입은 성도들의 성숙과 영혼의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 말씀과 기도와 성례를 주셨다. 종교개혁자들이 성례에 대해서 뜨거운 논쟁을 전개했던 것은 인간의 연약함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보았기에 정확하게 이해하기를 바랬던 것이다.

사람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낮춰주셔서 성례라는 은혜의 표지들을 주셨다. 세례와 성찬은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는 표적들이며, 이를 통해서 타락한 죄인들이 다시금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든든하게 세워져 나간다. 루터는 성례란 은혜의 약속들이라고 보았다. 죄에 대한 용서의 약속이라는 것이다. 칼빈은 말씀의 약속이 없다면 성례란 의미가 없다고 가르쳤다. 성찬에서 떡과 포도주는 하나님의 은혜가 실재하는 것이다.

은혜의 방편으로서 성례는 믿음을 뒷바쳐 주고자 제정된 것이다. 약속을 믿는 신앙이 없다면, 성례란 아무런 효력이 없다.

하나님의 은혜가 사람을 바꿔놓았고 믿음으로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었는데, 앞으로 나아가도록 연약함을 고쳐주신다. 하나님의 은혜의 도우심으로 훈련을 받아서 능력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루터는 신앙이란 나무의 뿌리와 같아서, 견고하게 자리를 잡아야 하고, 열매가 맺어진다고 가르쳤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충만한 심령을 가진 성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소원을 이루어 나갈 때에 선한 열매가 맺어진다. 갱신의 과정이 성화인데, 성령님은 적절한 원동력을 제공한다.

우리는 칼빈의 구원론에서 중요한 통찰을 발견하게 된다. 즉, 성도에게 베푸신 믿음의 축복은 결코 공로가 될 수는 없지만, 은혜를 받은 자들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거룩한 노력을 배제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즉, 성화가 칭의로부터 자라나서 평생 동안 점점 더 자신의 부족을 절감하게 되어지고,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자비에 의존하게 된다는 것이다.

칼빈은 칭의와 성화에 대해서 단지 구별할 뿐이지, 결코 분리할 수 없다고 했다. "당신은 성화를 동시에 붙들지 않고서는, 칭의를 붙잡을 수 없다.... 믿음과 선행이 함께 결합되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우리가 여전히 칭의의 근거를 선행이 아니라, 믿음에 둔다는 사실이다."

칭의를 얻은 성도는 자신과의 싸움을 지속하며, 내적인 투쟁을 지속한다. 성령이 성도 안에서 활동하는 가운데 죄와 싸우도록 능력을 부여해 주신다. 칼빈은 로마 가톨릭에서 가르치던 바, 성화가 완성되면 칭의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선포했다.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들은 죄와 죽음의 통치아래 있었던 상태로 그냥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로움을 드러내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필자는 칼빈이 남겨준 중요한 구원의 교리가 있음에 주목하고자 한다.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 믿음으로 역사하는 성령의 적용 사역들은 모두 다 사람이 능동적으로 노력하여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수동적인 믿음의 은혜를 받는 것이다. 하지만, 받은 은혜를 가지고 능동적인 믿음의 생활을 하는 측면에 대해서, 칼빈은 성도의 노력과 역할을 강조했다. 절대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서 믿음을 선물로 받아서, 인간은 수동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가 되었다. 그렇다면 믿음이란 항상 수동적인 상태로만 끝나는 것인가? 아니다. 성도는 언제나 사랑을 베풀어야 하고, 이웃을 향해서 은혜를 되돌려 주라고 자극을 받는다.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된 기독교인들은 수동적 태도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 거룩함을 이루려는 성도는 세상을 향하여서는 적극적으로 나아가서 순종하는 삶으로 바뀌어야만 한다.

성화의 진보를 향한 종교적인 노력을 하면서, 철저하게 인간의 자존심과 자만심을 벗어버리기는 결코 쉽지 않다. 인간의 수고와 노력이 있기는 하지만, 구원의 공로가 되기에는 아무 것도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 뿐이다. 인간은 거짓되고, 하나님만이 참된 분이시다.

어디에나 알곡과 가라지가 있다(마 13:24-30). 참된 성도와 거짓 성도들 구별하는 일은 하나님께 달려있다. 오직 목회자와 설교자는 최선을 다해서 분명한 설명을 제시하도록 해야 한다. 종교개혁자들은 훈련된 군사를 배출하듯이 성도들에게 말씀을 공부하고 기도하며 함께 격려하고 성찬을 나누는 제자훈련을 실시했다. 기도에 힘쓰면서 서로 환란의 시대에 격려하는 등, 작은 성경공부 모임은 경건한 성도들의 훈련에 필수적이었다.

칼빈의 칭의론과 성화론에서는 완벽주의와 갱신주의가 철저히 배척되었다. 중세시대 수도원에서 이상적인 영적 훈련을 제시하면서 도덕적 완전주의를 향해서 노력했지만, 자기진보와 자기 정당화에만 몰두하다가 그치고 말았다. 중세시대 스콜라주의와 각 종단들은 이웃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주어진 은사를 활용하지 않았고, 오직 현재 시대에서 완전한 상태에 이르고자 진력했던 것이다. 하나님에게서 좋은 평가와 높은 점수를 받으려 했던 자들이었지만, 결국에는 자신의 의를 세우고자 하여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들고, 이웃을 위해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칼빈은 고립된 영성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고, 도리어 가정, 세상에서의 소명을 중요하게 보았는데, 사소한 집안일들이 곧 성화를 이루는 곳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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