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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역사여행] 러시아에서 온 권서인 피득 선교사

- 권서인 피득 선교사와 여주 ‘한글시장’ 마음밭에 진리를 뿌리다

편집국|2021-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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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대계 러시아 출신 권서인 피득 선교사가 1895년 복음을 전했던 여주 장터(현 한글시장). 초봄을 맞아 여주 참빛교회 김에스더 전도사(왼쪽)와 신영식 집사가 행인에게 전도지와 마스크를 나누어 주고 있다. 피득은 구약성서 첫 한글 번역자이기도 하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3년 기간을 ‘공생애’라 부른다. 그 3년 동안 예수는 세례를 받고, 광야에서 40일간 금식기도 하며 사탄에게 시험받았으며, 백성 가운데로 오셔서 가난하고 병들고 억압받는 이들과 지내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가르치셨다. ‘문둥병자 소경 불구자 앉은뱅이 혈루병자 중풍병자 귀신들린자’ 등을 고치셨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셨으며, 권력자와 종교지도자들의 위선을 책망했다. 그리고 그들에 의해 죽임당한 후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 그는 공생애 3년 동안 단 한 번도 하나님 백성의 삶과 떨어진 적이 없다. 예수는 늘 현장에 있었다. 구원을 알리고, 우리의 죄를 십자가를 통해 지셨다.

남한강에 봄바람이 산들거리더니 강변에 실버들 새순이 싹트는 지난주였다. 경기도 여주 시내 남한강 변 ‘한글시장’은 평일임에도 사람들로 붐볐다. 세종대왕릉이 자리한 지역답게 모든 간판이 한글이었다. ‘한글과 세종’ 캐릭터를 살려 지역 활성화에 힘쓰려는 지방자치단체의 노력이 엿보였다.

그 시장 바닥에 파란 조끼를 입은 여성 두 분이 전도지와 마스크를 열심히 나눠주고 있었다. 여주 참빛교회 김에스더 전도사와 신영식 집사였다. 주 1회 시장을 중심으로 전도한다고 했다. 한강 물이 여전히 흐르듯 전도도 계속되고 있었다.

1895년. 조선 백성은 부패한 관리들과 외세에 의해 나라가 무너져 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옥죄는 박해에 희망이 없었다. 영적 갈급이 있었다. 메시아가 나타나 구원해 줄 것이라 믿었다. 그때 여주 장터, 지금의 한글시장에서는 콧수염을 한 한 백인 남자가 책 한 권을 들고 외쳤다.

“여러분 여기에 하나님 진리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으십시오.” 그는 예수의 생애에 대해 장터 군중에게 소리 높여 전했다. 권서인 알렉산더 앨버트(한국명 피득·1871~1958)였다.

‘수요일 아침 우리는 작은 읍 여주를 향해 출발해 밤에 그곳에 도착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시장 거리로 나갔습니다.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은 처음엔 우리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복음이 그들의 심령에 닿는 듯했습니다…’(당시 선교보고)

▲ 피득 선교사와 그 가족. 조선에서 첫 부인과 재혼 부인을 풍토병 등으로 잃었다. 

이 열정적인 전도자 피득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최근 일이다. 박준서 연세대 명예교수가 2017년 미국 LA 패서디나 외곽에 있던 그의 묘지를 발견하면서 연구가 본격화됐다. 박 교수는 학술적 연구와 기념사업회 등을 추진, 복음에 빚진 자의 마음을 대신하고 있다. 박용규 교수(총대대신대원)의 연구도 한몫했다.

그 당시 피득은 여주에서 ‘관청을 방문했다’고 한다. ‘그곳에는 여러 명의 관리가 모여 있었다. 우리를 소개한 후 복음에 대해 말하려 했다. 하지만 그들은 들어오라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한참 후 그들은 우리에게 들어와 앉으라고 했다. 나는 구원을 가져다주시는 예수의 생애와 죽음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러자 많은 사람이 복음서를 샀다.’

그가 방문한 관청은 현 한글시장과 가까운 여주시청 자리 동헌이었거나 송시열 사당 ‘대로서원’이었을 것이다. 조선 통치의 골격이 되는 주자학의 대가 송시열 사당이 있고 세종대왕릉이 있는 지역 여주 사람들에게, 또 척왜양창의라는 적개심이 민중들 가슴마다 박혀 있던 그 시대에, 복음 전파는 섶을 지고 불로 뛰어든 격 아니었을까. 더구나 여주는 당시 권세 가문 ‘여흥 민씨’ 세력의 본산이기도 했다.

▲ 피득 설립 성남의 첫 교회 둔전교회 예배당. 6·25전쟁 직후 증축 후 미션스쿨 효성학교 학생들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 예배당은 현 성남공군기지(아래사진) 자리였으나 1970년대 말 기지 건설로 성남 모란으로 이전했다. 


여기에 더해서 피득의 전도가 더욱 아슬아슬했던 것은 그의 주 선교 대상이 백정이었다는 것이다. 피득의 전도 여행을 뒷받침하고 함께했던 사무엘 무어(모삼열·1860~1906)가 예수의 평등 정신에 따라 백정 전도에 주력했으므로 사실상 그것은 조선 통치 근간을 흔드는 신분제 철폐와 맞닿아 있었다. 하지만 피득은 복음을 전하는 데 세상의 형편을 따지지 않았다. 오직 성령에만 의지했다. 1930년 피득은 ‘더 코리아 미션 필드’에 이런 기록을 남긴다. ‘모든 장소에서 백정들은 전도에 귀를 잘 기울였고, 모든 사람이 성경을 구입했다. 그 (여주 등을 포함한) 선교여행은 2주 넘게 진행되었다.’

사실 피득은 유대계 러시아인(현 우크라이나 지역서 출생)이었다. 조선 선교사 대개가 서양인이었던 터라 러시아인 선교사는 특별한 경우다. 피득은 유대 정통 가문 출신답게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 러시아어 독어 불어까지 능했다. 그런 그가 인생을 개척할 목적으로 미국행을 위해 홍콩으로 갔다가 일이 어그러졌다. 그리고 시베리아 철도 노무자로 일하기 위해 가던 중 일본 나가사키에서 피터스 선교사를 만나 회심을 하게 된다.

▲ 경기도 양평 지평교회. 경기 남동부를 집중적으로 전도했던 피득의 전도여행 길목이다. 

1895년 조선 땅에 들어온 그는 바울의 전도 여행과 같이 오직 전도에만 힘썼다. 선교편지에 나타난 기록은 멀리 목포에서 평양까지 발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조랑말을 탄 권서인이었다. 그중에서도 경기 남동부에 주력, 성남 둔전교회와 서울 세곡교회 등 많은 교회가 그의 사역으로 세워졌다.

▲ 지역교회사를 연구하는 김효영 원로장로(성남 둔전교회)가 피득 번역 ‘시편촬요’를 들고 있다. 오른쪽은 피득 작사 찬송 ‘내가 깊은 곳에서’. 

그를 통한 또 하나의 놀라운 역사가 숨어 있다. 구약의 최초 한글 번역이다. ‘시편촬요’라는 구약 번역이 히브리어에 능통한 그의 손에 이뤄졌다. 그리고 1906년 그는 성경번역위원으로 참여해 서양 선교사들이 감당 못하는 어학 재능을 쓰임받게 된다. 그의 한국어 실력은 지금도 시편을 읽다 보면 음률에서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한국어 천재는 찬송가 ‘눈을 들어 산을 보니’(383장)와 ‘주여 우리 무리를’(75장) 등 5곡의 작사자이기도 하다. 찬송가에는 한글명 피득으로 표기돼 있다.

▲ 여주 한글시장 인근 예수 생애 부조 앞에서 순례객들이 기도하고 있다. 

여주 한글시장. 도탄에 빠졌던 우리 백성은 선교사들의 한글성경 보급과 함께 문해 능력과 인권 인식이 향상됐다. 지금 피득 선교사(목사)와 참빛교회 전도인들은 126년의 차이에도 같은 공간에 서서 복음을 전한다.

▲ 알렉산더 앨버트 (한국명 피득) 

[알렉산더 앨버트 (한국명 피득·1871~1958) 연보]
·1871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출생
·1895년 4월 일본 나가사키에서 회심
·1895~98년 미국성서공회 소속 조선 권서인
·1898년 한글 번역 구약 ‘시편촬요’ 간행
·1926~38년 구약개역위원회 주도
·1941년 은퇴 후 美 LA 패서디나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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