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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 인간 내면의 심연 신앙적 통찰로 그려내

- 세계의 영성 작가, “용서와 사랑으로 끝내 부활하여라” 구원의 손 내미시네!

편집국|2021-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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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무엇인가?” 러시아의 도스토옙스키(1821~1881·아래 사진)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이는 결국 하나님을 향한 질문과 같다. ‘인간 안에 있는 인간’을 발견하는 것이 도스토옙스키 문학의 핵심적인 경향이다. 그는 작품을 통해 인간 존재에 대한 치열한 질문을 던진다.


니체가 “도스토옙스키는 무언가를 배울 수 있었던 유일한 심리학자였다”고 말할 만큼 그는 인간의 내밀한 심리묘사가 탁월했다. 소설 속 인물들은 포탄이 터지는 전쟁이나 철조망이 가로막는 이념의 분쟁이 없는 1800년대 러시아의 깊고도 깊은 평화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평범한 잿빛 일상 속에 드러나는 살인자, 윤락녀, 알코올중독자, 백치, 죽음을 앞둔 사람 등의 낯설고 어두운 인간의 본성이 더 위협적으로 느껴진다. 그는 극단적인 인물을 통해 인간 심리의 지하갱도를 파 내려간다. 독자들은 인간의 선의와 악마성, 병적인 치졸함에서부터 믿음의 위대함을 마주하면서 베일 뒤에 가려진 수수께끼 같은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소설 ‘죄와 벌’ ‘카라마조프 형제들’ ‘백치’를 유심히 살펴보면 그 흐름이 아주 뚜렷하게 드러난다. 인물들은 모두 아파 보인다.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비밀스러운 상처 때문인 듯하다. 그 상처는 곧 삶에 대한 질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상처와 아픔 속에서 참된 회복을 맛보게 된다.


‘죄와 벌’에서 사악한 범죄를 저지른 라스콜니코프는 윤락녀 소냐를 통해 ‘은혜’의 삶으로 들어갔다. ‘카라마조프 형제들’은 명석한 무신론자인 이반과 동생 알로샤를 대조적으로 그린다. ‘백치’에서 뇌전증을 앓는 왕자의 형태로 그리스도의 모습을 제시한다.

소설 속 인물들은 영원에 대한 갈망을 지니고 있으나 평범한 인간에게도 미치지 못해 파멸하고, 절망 속에서 고통스러워한다. 하지만 이런 불완전함 때문에 인간의 근본적인 한계를 알아차리며, 자신도 모른 채 저 너머에 있는 완전한 무언가를 가리키는 존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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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심문관’

특히 그가 3년에 걸쳐 쓴 말년의 대작 ‘카라마조프 형제들’에 등장하는 ‘대심문관’ 이야기는 도스토옙스키 문학의 정수로 꼽힌다. 둘째 아들 이반이 동생 알로샤에게 들려준 작품 속에 등장하는 또 하나의 작품이다. 이야기 전체적 흐름은 성경에서 사탄이 예수를 세 번 시험하는 이야기의 전개를 따른다.

무대는 16세기 스페인 세비야. 끔찍한 이단 심문과 단죄로 수백명이 화형에 처해진 어느 날,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몸으로 다시 이 땅에 오셨다. 예수님은 예전처럼 이적을 일으켰고 사람들은 환호했다. 이에 대심문관(종교재판관)은 예수 그리스도를 체포해 감옥에 가둔다. 아흔 살 된 대심문관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이교도를 대하듯 예수님을 심문했다. 대심문관은 지금까지 교회가 행한 비성서적인 제도로 민중을 속이고 억압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장황하게 설명한다.

“1500년 지나도록 우리는 당신의 가르침을 실행하기 위해 열심히 살았다. 그러나 당신 방식으로 절대로 안 된다. 교회가 인간들에게 행복을 주려면 세 가지 힘이 있어야 한다. 기적과 신비 그리고 권위이다. 이 세 가지가 아니면 그들을 잡아둘 수가 없다. 권위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단을 처형하고,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 내세의 존재를 확신시켰으며, 사람들을 묶어 두기 위해서 그들에게 현세적 이익을 주었다. 그러지 않았으면 남아 있을 사람이 없다.”

교회가 교회로서 살아남고 하나님의 영광을 현실 종교로 끌고 오기 위해서는 예수님식으로 하지 않고 대중이 좋아하는 방식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포퓰리즘을 쓰지 않으면 한 사람도 예수를 따를 사람이 없다는 것이 대심문관의 이야기였다.

또 대심문관은 예수가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을 받을 때, 사탄이 제안했던 세 가지 제안을 왜 수용하지 않았냐고 힐문한다. 그 세 가지는 “돌로 하여금 떡이 되게 하라.”(마 4:3) 물질에 대한 시험이다. “높은 데서 뛰어내리라.”(마 4:5~6) 자기 자랑과 영광에 대한 시험이다. “오직 나에게 절하라.”(마 4:8~9) 예배에 대한 타협의 시험이다.

예수님은 인간에게 자유를 빼앗고 싶지 않았기에 타협하지 않았다. 빵을 복종으로 얻어낼 수 있다면 그것은 자유가 아니다. 그런데 인간들의 고통을 해결해 주기 위해, 예수님이 거절했던 바로 그 세 가지 악마의 선물을 교회가 사들였다는 것이다. 교회는 인간에게 빵을 약속하는데 거기엔 조건이 있다. 인간이 교회의 권위에 인도함을 받는 것이다.

‘대심문관 이야기’는 로마교황 제도를 직접 겨냥한 것으로 보이나,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고 물질과 권력의 유혹에 빠져 자신을 고통으로 몰고 가는 우리 인간을 겨냥한 비난이다. 당시 제도권화되고 권위화된 종교, 신비·권위·기적으로 반석을 세운 종교 시스템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었다. 당시 교회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빵을 주고 기적을 보여주며, 종교재판으로 마녀사냥을 하며 권위를 보여주었다. 교황이 왕들의 권력을 움켜쥐고 있었다. 거기엔 황금이 있었다.

아흔 살 노인 대심문관의 핏기 없는 입술은 파르르 떨면서 “내일 나는 그대를 화형에 처할 것이오”라고 말한다. 이에 예수님은 조용히 대심문관에게 다가가 입을 맞춘다. 노인은 몸을 부르르 떨며 “어서 가라. 그리고 다시는 오지 마라”며 도시의 어두운 광장으로 그를 풀어준다.

▲ 티치아노의 ‘십자가를 지고 계신 그리스도’. 타락한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인간사회 모든 문제의 해결책은 용서와 사랑뿐이란 것을 말하는 듯하다. 도스토옙스키는 죄 안에서 자신을 재발견할 때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이 임한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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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이 아닌 부활

도스토옙스키는 대심문관의 비난에 대해서 조용히 다가가 입맞춤함으로써 인간사회 문제의 해결책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 가르치는 용서와 사랑밖에 없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것이 도스토옙스키의 대답이다. 이는 끔찍한 불신앙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게 그가 소설 ‘카라마조프 형제들’을 통해 주는 답이다. “하나님께서 승리하실 거야” 이 대답 속에 용서가 있다. 용서는 그리스도를 배반한 교회에 대한 용서이기도 하다. 도스토옙스키는 종교 그리고 교회와 씨름하면서 그 안에 감춰져 있는 반역, 즉 하나님에 맞서는 인간의 반역과 씨름했다.

도스토옙스키 소설들의 결말은 ‘몰락’이 아니라 ‘부활’이다. ‘카라마조프 형제들’에서 아버지를 죽인 누명을 쓰고 교도소에 갇힌 큰아들 미챠 카라마조프의 목소리이다.

“알로샤. 나는 지난 두 달 동안 내 안에서 새로운 인간을 발견했단다. 내 안에서 새로운 인간이 부활했어! 이 사람은 전에도 항상 내 안에 숨겨져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이런 악천후를 보내주지 않으셨더라면 내 안에 이런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을 거야. …내가 정말 두려워하는 건 완전히 다른 건데… 내 안에서 부활한 그 인간이 다시 나를 떠날 수도 있다는 것, 그것이 나의 걱정이고 두려움이야.”

도스토옙스키는 신성한 곳, 성자에게서가 아니라 늪과 같은 곳, 타락한 죄인 속에서 구원과 은혜를 찾는다. 죄 안에서 자신을 재발견할 때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이 임한다. 그의 깨달음과 성서의 궁극적인 통찰이 근본적으로 일맥상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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