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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새해 특별기고]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신가?

- 이상규 박사. 계속되는 재난과 고통과 불의, 하나님은 왜 침묵하시는가

편집국|2021-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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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침묵 너무 길다? ‘때’에 대한 우리 개념일 뿐
궁극적으로 우리 역사를 당신의 거룩한 뜻에 이루실 것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원근법’으로 역사를 보는 안목
인식하든 못하든, 우리 날들은 오직 주님 손 안에 있다
▲  ⓒImage by 5hashank from Pixabay 

하나님은 역사를 주관하시는가?

흔히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이고 역사의 주관자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을 보면, 정말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일까 하는 의문이 들 때가 있다. 하나님은 정말 살아 계시고 우리가운데 역사하실까? 그 분은 지금도 인간의 역사 속에 개입하시고 간섭하실까?

그렇다면 어떻게 악이 존재하며 의로운 사람이 고통당하고, 불의와 부정의가 활개 칠 수 있을까? 어떻게 거짓과 위선이 활개치고, 참학(慘虐)과 광포(狂暴)가 줄을 잇고, 무죄한 이가 칼날에 쓰러지고, 의로운 외침이 곡절(曲折)되고, 불의한 자가 권력을 잡고 불법을 자행할 수 있는가?

이런 의문은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라,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주전 12세기경에 살았던 욥은 ‘왜 의인이 고통당해야 하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 치하의 일본에서 천주교도들도 동일한 질문을 했다. 엔도 슈사쿠(遠藤周作)의 소설 ‘침묵’에는 이런 질문에 대한 작가의 고뇌가 그려져 있다.

나치 하에서 유대인들의 의문도 동일했다. 만일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왜 하나님은 이 살육의 현장에서 침묵하고 계시는가?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찾으며 절규했다. 아우슈비츠에서 기적적으로 목숨을 구한 엘리 위젤(E. Wiesel)은 그의 책 ‘밤(Night)’에서 “하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시는가?”라고 물었다.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 의문이 있다. 실제로 인간의 역사에는 우리가 답할 수 없는 문제가 수없이 많다. 이런 일들을 우리는 다 알 수 없지만 여기에는 하나님의 숨은 뜻이 있다고 보았고, 이 숨은 뜻을 마르틴 루터는 ‘하나님의 마스크’라고 불렀다.

성경적 조명

결국 우리는 성경에서 답을 찾을 수밖에 없다. 성경은 이런 점에 대해 분명하게 답하고 있다.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자일 뿐 아니라 역사의 주관자이며,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시고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창세기 50장 20절에서 요셉은 하나님이 인간의 삶을 주관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고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다. “당신은(사람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셨습니다.”

요셉은 형들에 의해 이집트로 팔려가 갖은 고난을 겪었으나, 하나님은 그를 통해 자기 백성을 구원하셨다. 야곱의 식구들이 양식을 구하기 위해 이집트에 내려갔을 때가 흉년이 시작된 지 2년째였다. 흉년은 5년 더 계속될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요셉을 이집트에 미리 보내지 않으셨다면 야곱의 식구들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 속에 개입하시고 인간의 악행을 통해서도 자기 백성을 보존하신 것이다. 그래서 요셉은 나를 이곳으로 보낸이는 당신들이 아니라 하나님이라(창 45:8)고 고백한다. 단지 사람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을 따름이다.

하나님은 초월적 존재이지만 역사 저편에서 팔짱 끼고 계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 한복판에서 역사를 주관하시고 통치하신다는 점을 보여 주고 있다. 초월해 계시면서도 내재하시는 하나님, 내재하시지만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 영화 <사일런스> 중 한 장면. 원작 <침묵>은 하나님의 ‘침묵’과 참된 신앙에 대해 성찰하게 하는 소설이다. 

영국의 이신론(Deism)은 하나님의 창조는 인정하되, 하나님의 역사 간섭은 부인했다. 이들은, 피조된 세계는 자연법칙에 따라 움직일 따름이고 신은 인간 역사에 개입하거나 간섭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하나님의 역사 간섭을 부인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은 창조자일 뿐 아니라 창조하신 세계를 다스리시고 인간 역사의 통치자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역사에 개입하시고 간섭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성경의 가르침은 수없이 많다.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이시고(대하 36:22, 스 1:1) 포로된 자기 백성을 귀환하게 하신 이는 하나님이셨다. 그래서 역대하 36장은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께서 바사의 고레스 왕의 마음을 감동시키셨다(God moved the heart of Cyrus king of Persia).”

작은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수중에 있다(마 10:29)고 말한다. 비록 볼테르는 “역사는 인간의 그림자”라고 하여 하나님의 역사 간섭을 배제하고 인간이 역사의 주체인 것처럼 말했으나, 하나님이 역사의 주체이며 역사의 주관자라는 점을 말하고 있다. 그 동일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 가운데 역사하고 계신다.

헬라인과 히브리인들의 역사 이해

고대 그리스인들은 역사를 끝도 시작도 없는 무한한 반복으로 보았고, 그 역사 과정은 맹목적인 순환으로 보았다.

농경 문화권 속에서 계절의 순환을 보고 살았던 그리스인들은 역사를 맹목적인 순환의 과정으로 이해했다. 저들은 자연의 순환에서 역사의 순환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영원회기론(永遠回歸論)이 나왔다. 인간과 자연 만이 아니라 신들도 예외일 수 없었다. 신들도 역사의 순환 속에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리스 철학의 밑바닥에는 운명론 혹은 숙명론이 자리하고 있다.

이를 그리스인들은 모이라(Moira, μοῖρα)라고 불렀다. 그리스인들은 역사 외적인 요인을 보지 못했기에, 불트만(Rudolf Bultmann)은 “그리스인들은 역사를 본 것이 아니라 자연을 보았다”고 말한 바 있다.

희랍(헬라)인들은 역사를 맹목적인 순환의 과정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역사에서 새로운 것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고 보았고, 따라서 역사에서의 진보나 발전의 개념(the idea of progress)도 없었고 역사가 지향하는 목표도 없었다. 역사는 무한한 반복일 뿐이었다.


그러나 히브리인들은 희랍적인 회기론을 극복했다. 이들은 희랍인들과 달리 역사의 분명한 시작과 하나님의 역사 간섭, 그리고 역사의 분명한 목표를 상정했다.

즉 역사란 하나님의 창조와 더불어 시작되었고, 역사 과정은 하나님께서 개입과 간섭, 그리고 역사란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전개되는 과정으로 이해했다.

역사는 하나님이 정하신 목표를 향한 과정이었다. 그 역사는 모든 인류를 포용하는 일원론적(一元論的)인 것이었다. 히브리인들은 역사의 무한한 회귀만을 믿었던 운명론적 역사이해와 달리, 역사는 목표를 향한 선적(線的)인 과정, 곧 직선적 역사관(liner view)을 가지게 되었다.

자연은 신비로운 자존실체(自存實體)가 아니라는 인식에서 히브리인들은 자연중심사상을 탈피할 수 있었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았기에 자연을 비신격화(dedeify) 할 수 있었다.

자연은 신비로운 정령(精靈)이 아니라, 하나님이 무에서(ex nihilo) 창조하신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은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분리시킬 수 있었고, 역사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하게 된 것이다.

정리하면, 역사는 하나님의 창조로부터 시작됐고, 그 역사과정은 의미 없는 반복이 아니라 유의미한 진보이며, 역사는 하나님 나라를 향해 가는 목적 있는 과정이라고 본 것이다. 이것이 히브리적 역사이해였다. 히브리적 역사관을 계승한 것이 기독교 역사이해이다.

기독교적 역사이해

기독교의 역사이해는 근본적으로 다음 3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역사는 하나님의 창조, 인간의 타락,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계획이 펼쳐지는 과정이라는 점이다. 이와 같은 역사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을 구원사관(救援史觀) 혹은 구속사관(救贖史觀)이라고 말한다.

둘째, 모든 역사 과정은 맹목적이거나 자연이나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개입하시고 간섭하시고 섭리하신다는 점이다. 이를 섭리사관(攝理史觀)이라고 말한다.

셋째, 역사는 분명한 시작과 함께 분명한 목표 곧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한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사관을 목적론적 사관(目的論的 史觀)이라고 말한다.

역사는 맹목적인 반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과정이며, 역사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정하신 목표를 행해 나아가는 과정이다. 그래서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라고 믿고 있다.

▲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는 모험적인 일이다. ⓒBen White on Unsplash 

비관주의적인 낙관주의자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per verbum) 무에서(ex nihilo)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피조된 세계를 유지하시며(conservatio) 다스리신다(gubernatio). 그래서 역사는 분명한 시작과 함께 하나님이 설정하신 분명한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

지구 궤도를 돌고 있는 수많은 별들과 자연계의 미미한 현상들, 그리고 복잡한 인간의 삶이 다 그의 다스림 아래 있다.

그렇다면 왜 우리 사회에는 악이 활개치며, 공의가 무너지고 의로운 자가 핍박당하는가? 따지고 보면 우리의 모든 문제는 범죄한 인간의 악함 때문이다. 인간의 죄와 죄된 욕망, 욕심 탐욕, 권력에의 야망, 곧 악함이 자연을 파괴하고 거짓과 불의를 행하고 인간 생명을 살상하고 있다.

오늘 우리 현실을 보면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때로 앞이 보이지 않는 긴 턴널을 지나는 것 같아 절망하기도 한다. 이럴 때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의 역사를 주관하는가 묻기도 한다.

이런 우리의 인식을 마르틴 부버(Martin Buber)는 ‘하나님의 일식(日蝕) 현상’이라 불렀다. 하나님이 역사를 다스리시고 통치하시지만, 마치 달이 해를 가려 해가 보이지 않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에게는 역사를 긴 안목으로 헤아리는 안목이 없다. 눈앞의 현실만 인식할 뿐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섭리를 통시적으로 파악하지 못한다. 우리의 단견(單眼)으로는 하나님의 침묵을 이해할 수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역사를 긴 안목으로 굽어보는 장견(長見)이다. 지금은 이해할 수 없으나 먼 훗날 하나님의 인내와 침묵, 인간의 악행을 허용하신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시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쉬 낙담하고 절망하기도 한다. 우리의 시각으로 볼 때, 우리의 현실은 절망적이고 비관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낙관할 수 있다.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라는 점에서,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비관론적 낙관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인간의 불의와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침묵이 너무 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때’에 대한 우리의 개념일 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때를 이해할 수 없다. 지금 우리는 헤아리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역사를 당신의 거룩한 뜻 안에서 이루어 가실 것이다. 우리에게 역사를 원근법(perspectively)으로 보는 안목이 필요할 뿐이다.

우리가 인식하든 인식하지 못하든 우리의 날들은 오직 주의 손 안에 있다. 그러했기에 시편 기자는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나이다(My times are in thy hand)”라고 고백했을 것이다.

▲ 이상규 박사. 

이상규 박사
백석대 석좌교수, 고신대 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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