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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이 코로나?’ 코로나19적 ‘도올 GMO 복음’을 경계하며

- 김용옥의 성경 강의에 대하여 조직신학자와 도올이 서로 묻고 답하다

편집국|2020-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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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숙 목사
인터넷 선교 사역자
리빙지저스, 박현숙TV
https://www.youtube.com/channel/UC9awEs_qm4YouqDs9a_zCUg
서울대 수료 후 뉴욕 나약신학교와 미주 장신대원을 졸업했다. 미주에서 크리스천 한인 칼럼니스트로 활동해 왔다.
▲ 박현숙 목사. 

도마복음 10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예수가 말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질렀다. 보라, 나는 그것이 불타 오르기까지 그것을 주시하고 있다!”

이 말씀의 내용을 보면, 주님께서 불을 세상에 던지셨는데 아직 불이 세상에 붙어서 활활 타오르지 않아 한 순간도 눈을 떼지 못하고 주시하신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도마복음은 어록이므로 충분한 전후 문맥을 참고할 수 있는 자료가 불충분하다는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공관복음을 살펴야 한다.

누가복음에 이와 유사한 말씀이 나온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눅12:49)”.

여기서도 아직 불이 붙지 않아서 불이 붙길 간절히 기다리신다고 말씀하신다. 불을 땅에 던지는 주님의 몸짓을 생각해 보니, 어떤 연관된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가? 이 정경은 도마복음 전편에도 나왔지만, 공관복음에 나오는 씨 뿌리는 자의 모습을 생각나게 한다.

씨를 뿌린 후 농부의 심정, 즉 씨를 땅에 뿌렸으나 씨가 아직 흙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지 못하여 이를 기다리는 농부의 초조한 심정이 읽혀진다.

씨 뿌리는 자는 주님이요, 씨는 말씀을 뜻한다고 예수께서 해석을 해주셨다. 그러므로 불을 던지고 씨를 뿌리는 주님의 모습에서 불과 말씀과의 연관성을 생각하게 된다.

이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이다.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눅 12:50)”.

불을 던지라던 주님께서, 왜 별안간 세례에 대해 말씀을 하셨을까? 세례를 온전히 받으실 때까지 기다리기가 답답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불이 붙길 기다리는 주님의 답답함과 의미가 오버랩 되는 것으로 보아, 불이 붙는다는 것은 주님께서 세례 받음을 이루신다는 말씀과도 연관이 된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세례는 무엇일까?

이미 물세례도 성령세례도 다 받으신 주님께서 받으실 세례란 두말할 것 없이 십자가 지심 즉 고난과 죽음의 세례일 것이다.

이 고난과 죽음의 세례를 어서 마치길 원하시는 주님의 표현에서,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으신 사명을 자원해서 반드시 완수하고 싶어하시는 주님의 심경을 헤아릴 수 있다.

주님의 십자가 지심과 죽음을 만류하는 베드로를 단호하고 엄하게 꾸짖으셨던 주님의 모습과 더불어, 겟세마네 동산에서 심한 통곡과 눈물로 땀방울이 핏방울 되도록 고뇌 속에서 기도하시던 역사적 인간 예수의 모습이 클로즈업된다.

이렇게 치열한 기도를 통해 스스로의 메시야적 사명감을 재확인하셨을 주님께선, 마치 강도를 사로잡듯 흉기를 들고 나타난 무법한 무리들의 손에 순한 어린 양처럼 잠잠히 자신을 맡기시기에 이르신다.

가만히 느껴보라. 평소 목자 없는 양같이 유리하는 인생들에 대한 연민으로 한없이 아파하시고 슬퍼하시던 주님이셨기에, 자신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의 세례를 통해 온 인류를 위한 구원의 문을 여시게 될 것을 생각하시고 얼마나 가슴이 뛰셨겠는가?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씀한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

그런데 도올 같은 이는 도마복음 10편의 불타오르는 것을 주시하시는 주님의 애 끓는 심경을 불쑥 어떤 시인의 충동적인 시어에 빗대, 거룩한 사명의 본질을 호도한다.

마치 감도는 취기 속에 어스름한 도심의 빌딩 속에서 황막한 숲을 바라보다 불현듯 목가적인 혁명을 꿈꾸는 시인의 심정인 양, 제법 흥에 겨운 듯 감상 일색으로 몰고 가는 수선을 피운다.

이런 맥락에서 도올이란 자가 그의 마가복음 강의에서, 십자가 처형을 목전에 둔 주님의 심경에 대해 자신만이 역사상 전무후무한 예수의 공감자라고 허언을 남발하며 ‘파토스적인 고독이니 비애니’ 읊조리면서 한껏 멜랑꼴리한 분위기를 연출하다가, 종국적으로 십자가 위에서의 주님의 절규에 대해 살기를 기대했던 한 가닥 희망이 좌절된 것처럼 비아냥거리는 것엔, 실소와 동정을 넘어 그 인격의 조야함과 경조 부박성에 그만 모골이 송연해진다.

그러므로 이런 이의 해석은 그때 그때 붓 가는 대로 수필 쓰듯이 그저 영혼 없는 몸처럼, 기분대로 마음 가는 대로 자의적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넌센스의 연속인 것이다.

그가 이토록 엉뚱한 해석을 무례하게 남발하는 요인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첫째론 한국 기독교에 대한 사회적 호감도가 저조한 것이 그의 무분별한 광기어린 객기를 부축이는 요인일 테다.

둘째로, 비서술적 도마복음의 한계는 논외로 하더라도, 스스로가 근본적으로 주님의 그리스도적(메시아적) 정체성, 즉 십자가를 통한 인류 구원의 사명을 부여 받은 것에 대한 이해가 전혀 결여돼 있어 성경의 맥 조차 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셋째, 마가복음을 읽어 내려가면서 그간 줄곧 그 자신이 주장하던 바와 반대로, 예수의 십자가 처형의 결정적 이유가 예수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확언인 것이 자명한 대목에 가서도, 순간 스치는 그의 얍삽한 표정이 증거하는 바, 바로 이어질 자신의 중국사상 강의에 사람들이 더 신뢰를 두고 모여들게끔 유도하기 위해 앞뒤가 안 맞는 마구잡이 억지 해석으로 교묘하게 진실을 가리고 성경을 알지 못하는 시청자들을 손쉽게 속이려 하기 때문이다.

도올 자신이 성경 지식에 대한 백그라운드가 없는 것은 논외로 하더라도, 그 자신 평생 노력을 투자해온 중국 사상에 대한 실력을 인가(?)받기 위해 그토록 말끝마다 노골적으로 조롱하는 서양에까지 가서, 동양 사상에 대해 자연 미흡하고 일천할 수 밖에 없는 미국 학계에서 구태여 수월히 학위를 받아왔다는 것은 그의 이중적 가치관을 드러낸, 슬픈 쥐의 윤회적 딜레마 같은 것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이젠 노골적으로 진리보다 중국 사상적인 자산을 씨앗으로 한국 사회에 중국몽을 퍼뜨리고 인종과 국적과 문화를 초월한 진리 체계인 기독교를 억압하고자 진리 대 비진리의 대결이 아닌 동양 대 서양의 대결로 대중들을 선동하고 기독교를 모함하는 무지의 만용을 발휘하고 있다.

자기 근원에 대한 정체성이 빈곤하면 빈곤할수록 우리가 외부 환경에 쉽게 동요되듯, 성경을 대하는 자세도 이 같은 예가 똑같이 적용된다.

도올이 구약을 그토록 폄하하는 이유는 기독교의 뿌리인 구약을 뽑아내야 신약을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에 대한 근본 정의를 모르기에 예수가 유대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그는, 예수를 구약 철폐의 혁명가로 주장한다. 언뜻 듣기엔 그럴싸하게 들릴지 모르나, 실제 내용은 성경의 진리와 전혀 무관하다.

요컨대 그는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이 동일한 하나님이라는 전제를 철회시킴으로써, 예수의 영적 혁신을 신/구약의 기저에 공통적으로 흐르는 창조주 하나님의 인류 구원에 대한 계획의 완성이 아닌, 구약의 하나님의 말소로 유도하고 있다.

그러기에 구약에 정통한 학자로서 신약의 체계적 정립을 완성한 바울은 이 자가 넘볼 수 없는 제일의 천적이다. 도올의 바울서신이란 것도 그저 바울의 주변만 서성이는 정도일 뿐, 도올 그 자신은 기독교 신앙의 주변인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도올이란 자의 문제는 그저 기독교를 반대하거나 개독교 운운하며 질타하는 수준이 아니다. 그는 마치 공산당들이 거짓 선전선동을 일삼듯, 자신의 그릇된 이념을 대중들에게 주입시키기 위한 책략을 구가한다.

정작 성경에 대한 평균적 지식이나 영적 감수성이라곤 없는 그가 강의 때마다 이제껏 아무도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았다고 단정적이고 반복적으로 기염을 토하며, 구약의 정신을 흑색 선전하고 신약의 예수를 자신의 아바타로 만드는 작업을 쉬지 않고 있다.

문득 유전자 조작(GMO)이란 단어가 떠오른다. 이것에 대한 위키백과 사전의 해설은, “기존 생물체 속에 다른 생물체의 유전자를 끼워 넣음으로써 기존의 생물체에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성질을 갖도록 한 생물체이다. 본래 유전자를 변형 및 조작하여 생산성 및 상품의 질을 높이는 등의 목적으로 생산되고 있다”이다.

말하자면, 도올은 예수의 복음 속에 자신의 창작드라마적 복음을 끼워 넣어, 기독교의 생명인 예수의 십자가의 구속의 진리를 변형하고 조작하여 성경의 산 체험이 없는 사람들을 교묘하게 미혹함으로써 도올 복음을 통한 자기 이윤을 생산해 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생명의 창조자인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영적 유전자인 영생의 말씀, 즉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작위로 변형되고 조작될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님을 도올은 반드시 알아야 한다.

이런 자가 요즘 한층 더 변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된 것처럼, 전례 없이 변종 내지 신종 성경 강의 후 기독교 흑선전으로 뭇 사람들을 오도하는데 열을 내고 있다.

유대인들을 무턱대고 배척하며 히틀러를 추켜세우고 유대인들에 대한 히틀러의 공헌 운운하는, 필시 레닌과 마오쩌둥 계열의 도덕심에 화인 맞은 이 자가, 하나님의 영역인 예수와 성경 말씀, 마가와 바울을 비롯한 성경 저자들의 영적 유전자를 변형 조작하여 자신의 섣부른 지식과 이름 팔이의 생산성과 이윤을 높이는 목적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가히 GMO(genetically modified organism) 복음을 전하는 도올 코로나라 칭하기에 손색이 없을 듯 하다.

이제 다시 누가복음 12장에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으로 돌아가 보자.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눅 12:51)”.

주님은 한 집안에 있는 가족 간의 불화를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 즉 말씀과 주님의 십자가 고난의 세례가 현실적 삶에 있어 사람간의 분쟁과도 연관이 됨을 알 수 있다. 이와 또 유사한 말씀을 우리는 또 마태복음에서 볼 수 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 10:34)”.

여기선 분쟁이라는 표현 대신 검이란 표현이 쓰였다. 검의 의미는 일차적으로 물론 화평과 반대인 분쟁을 의미한다. 하지만 또 다른 검의 성경적 의미는 성령의 검으로 표현되는 말씀을 일컫는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역시 검의 잠재적 의미인 말씀이 인간 관계의 불화의 요인이 되는 요소로 작용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마 10:36-38)”.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하지 않은 자연인으로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깨달을 수 없기에, 또 세상의 법은 성령의 법과 대적 관계에 있기에, 우리가 인간적인 일에 우선순위를 놓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우선순위로 놓는다면 경우에 따라 인간 관계에서 상호 평화가 깨지게 되고 갈등이 생겨나게 된다.

생각컨대 주님께서도 세상 사람들에 의해 십자가를 지실 수 밖에 없으셨을진대, 하물며 우리야 어떻겠는가?

그러나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부활의 영광의 주가 되셨듯이, 우리도 주님의 말씀대로 저마다 십자가를 온전히 감당하면, 종국엔 주님의 부활의 영광에 동참하는 최후 승리자가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불에 대한 성경 말씀을 전반적으로 살펴보면, 구약에서 불은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하신 임재를 상징하는 표현으로 씌여진다.

여호와께서 모세를 부르실 때에 불붙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나타나신 장면이 나온다. 또 모세가 율법과 계명을 기록한 돌판을 하나님께 받으러 하나님의 산에 올라갔을 때 “산 위의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 자손의 눈에 맹렬한 불 같이 보였다(출 24:17)”고 말씀한다.

또한 불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악을 심판하시는 표현으로 나온다.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신 4:24)”.

“그러므로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살진 자를 파리하게 하시며 그의 영화 아래에 불이 붙는 것 같이 맹렬히 타게 하실 것이라(사 10:16)”.

그리고 역시 이 불은 우리의 죄성을 두드리고 일깨우며 회개케 하는 말씀을 비유하는 표현으로도 나온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렘 23:29)”.

특히 신약에서 불은 성령 즉 성령세례와 관련이 된다. 세례 요한은 예수께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라고 했다(마 3:11).

오순절 성령 강림의 역사에서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각인에게 임함으로 모두가 성령의 충만함으로 방언을 하게 된 것으로 보아 여기서도 불의 역사는 말씀과 연결이 됨을 알 수 있다.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말씀, 성경엔 권능이 있고, 이 권능은 성령의 세례와 관련이 있다.

종합적으로, 도마복음 10편에서 이 세상에 불을 던지시고 그것이 불타오르기까지 주시하신다는 주님의 말씀에서 우리는 말씀 자체이신 주님, 즉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주님께서 세상의 인간들의 심령에 말씀의 불씨를 심으러 오신 것임을 알 수 있다.

스스로가 말씀의 불이신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의(義), 하나님의 율법(말씀)을 몸소 이루시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다.

무엇이 하나님의 의인가? 이는 우리의 죄악을 용납하실 수 없는 공의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속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우리의 믿음을 통해 우리를 의롭게 여기시는 은혜와 사랑의 의를 말한다.

이 같이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절절한 사랑의 염원을 이루시고자, 곧 주님께서 몸소 인류의 구원, 영생의 문이 되려고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치셨듯, 인류의 죄악을 향해 퍼부으시는 하나님의 소멸하는 불, 그 엄청난 심판의 불을 혼자 다 영육간에 한번에 온전하게 담당하셨다!

이렇게 고난의 세례를 온전히 다 받으신 주님께선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하나님의 영광의 불로, 온 세상을 사랑으로 태우시는 진리의 불로 지금도 타오르고 계신다.

주님께선 불꽃 같은 눈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의 심령을 감찰하시며, 간절하시고 절박한 마음으로 불 같은 말씀의 씨앗이 옥토된 우리의 심령 가운데 온전히 뿌리를 내리고 심어져,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 그런 삶으로 영생의 부활에 동참하는 우리가 되길 지금 이 순간도 우리를 주시하시며 기다리고 계신다.

현재 전세계적으로 퍼져나간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생물체 안에서만 증식이 가능하지만, 이모저모로 우리의 영혼을 오염시키는 영적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예수의 생명을 덧입은 부활 생명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겐 조금이나마 기대고 안주할 자리라곤 없다.

도마복음 10편 말씀을 통해 우리 심령에 말씀의 불을 지피신 주님의 사랑에 우리가 점화되어서, 영육간의 코로나 바이러스를 태울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 각자가 활활 타올라, 각인의 작은 불꽃과 불꽃이 주님의 전 우주적인 큰 사랑의 불꽃과 연합되어, 이 세상을 온전히 주님의 진리와 사랑의 불로 밝히는 우리 모두가 되길 기도하며 소망한다.

▲ 도올 김용옥 교수가 조직신학자, 구약학자들과 한자리에 선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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