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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직 목사 설교] 기독교와 공산주의

- 마태복음 4:1~11. 제목: 1947년 건국과 기독교

편집국|2019-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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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한경직 목사님의 생전 설교 전문을, 소개합니다. 한 목사님은 한 설문조사에서 '가장 존경하는 목회자' 1위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고인의 생전 설교가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늘날 한국교회에 생생히 울려퍼지길 바랍니다.
▲ 故 한경직 목사  

8·15 해방 이후 대한 사상계에 있어서 가장 요원화세(燎原火勢 무서운 기세로 퍼져 나가는 세력 따위를 비유함)로 일어난 사상은 공산주의입니다. 최근에는 신민주주의니 진보적 민주주의니 하고 개명을 하여 뭇사람의 뇌수를 혼미케 할 뿐 아니라, 지금 38선으로 말미암아 이국(異國)처럼 된 북한에 있어서 정치 사회는 공산주의 일색으로 되어 버렸고, 교회는 참으로 억울한 박해를 당하고 있습니다. 현상이 이에 이르렀으므로 내가 '기독교와 공산주의'라는 주제로 기독신자의 입장에서 이 사상을 검토, 비판함으로써 이 혼돈한 현 사상계에서 우리 신자들이 걸어나가야 할 노선을 명확히 파악하여 위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아래로는 모든 동포에게 참된 길을 주자는 것입니다.

봉독한 성서본문을 가만히 보면 "...주리시더니" "시험하는 자가" "...이 돌을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는 말씀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사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인류가 다 당하는 경험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첫째로 '주린 대중' 노동자, 농민, 소시민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하루의 양식도 찾지 못하고 굶주리고 있고, 둘째로는 '시험하는 자'가 있는데 이는 대중이 주릴 때에 반드시 찾아옵니다. 셋째로는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시험입니다. 이 시험의 요지는 부당한 수단으로라도 "어서 먹어라, 먹어야 산다, 먹고야 볼 것이 아니냐."하는 것입니다. 밀을 가지고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하면 시험이 아닙니다.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데 시험의 핵심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주린 인류가 당하는 이 큰 시험을 인류의 대표로서 완전히 이기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는 진리로 마귀를 물리치셨습니다. 이 진리의 뜻은 물론 사람은 먹어야 삽니다. 그러나 사람은 다만 먹고만 사는 짐승이 아니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입은 사람인즉 곧 영혼의 소유자이므로 육신만 살기 위하여 영적 생활을 희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회개조니 혁명이니 운운하는 이들의 실수는 대개 이 점에 있습니다. 대중이 경제적 해결을 위하여 몰두하는 중에 사람은 단순히 먹고만 사는 동물 이상이라는 것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기독교와 공산주의와의 관계를 말씀드리기 전에 먼저 마음에 분명히 기억할 것은 본래 종교, 특히 기독교는 사회의 제도를 초월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영적 생활에 관계되고, 이 영적 방법을 윤택케 하는 것이 그 주요 사명이지, 인간의 사회생활 특히 경제생활을 지도하거나 계몽하는 것이 본래의 목적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회의 사상이라도 단순히 사회문제 경제문제만 국한되고 그 범위를 넘지 않는다면 이론적으로 종교와 사회사상 사이에 마찰될 것도 없고 충돌될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못하여 기독교도 영적 방면이 그 주요 세계이나 인간 생활 전체에 그 영향을 주고, 사회사상도 어떤 것은 사회문제에만 국한하지 않고 그 범위를 넘어서 어떤 형이상학적 철학을 배경으로 하고 선전하며 또는 종교를 곡해하여 무리한 간섭과 박해를 가하는 데 마찰이 일으켜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사회제도를 초월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기독교는 봉건제도 아래에도 있었고, 자본주의 제도 아래에도 있었고, 또 어떤 다른 제도 아래에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제도와 반드시 결합하는 일은 없습니다. 봉건제도 아래에 있었다고 기독교가 그 제도와 결합된 바 아니고, 간단(間斷 끊임)없는 마찰과 비판 중에 존재하였고, 자본주의 제도 아래에 있었다고 이를 전적으로 시인한 것은 아니고, 그 결함과 단점을 비판하여 투쟁해 온 것입니다. 요컨대 기독교는 완전한 천국이 임하기에 이 불완전한 사회제도 아래에 있으면서 이를 초월하여 힘이 닿는 대로 사회를 기독교화 하기에 최대의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사회사상이란 안경을 통하여 기독교를 생각해 본다면 기독교의 동정은 자본 계급보다 오히려 노농(勞農 노동자와 농민) 편에 있습니다. 그것은 4복음에 기록된 예수의 행적을 보아서, 혹은 성경의 교훈을 보아서, 혹은 초대 교회의 유무상통 제도를 비롯하여 수도원 같은 제도를 만들며 내려온 기독교의 역사를 보아서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혹은 희랍정교회처럼 실수한 적은 있으나 기독교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주고 얽매인 자에게 해방을 주는 사명을 갖고 온 것입니다.

그러면 공산주의도 노농계급 해방운동이고, 기독교도 노농계급에게 복음과 해방을 주는 종교인데 항상 서로 반대하는 지경에 있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이렇게 된 책임은 양편에 다 있다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제정 러시아에 있어서 희랍정교회가 귀족 또는 정부와 결탁하였던 실패에 책임이 있고, 공산당 사상과 그 운동자들이 종교에 대하여 무리한 박해를 가행(加行)한 것에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면 공산당의 사회사상인 공산주의는 대체 어떠한 것입니까? 이에 대한 항간의 관찰을 살펴보니 (1) 네 것 내 것 없이 누구나 다 같이 먹고 같이 입고 같이 사는 것 (2) 일은 조금 하고도 넉넉하게 살고, 교육은 나라에서 시켜주니까 받을 수 있고, 병나면 치료비 없이 약값을 받지 않고 고쳐주고 (3) 능력에 의하여 일하고 요구에 의하여 주고(부하린의 공산주의 ABC에서) (4) 계급을 타파하고 남녀평등을 주창하는 것이 공산주의라고 이렇게만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유토피아 관념이고 공산주의가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혼돈해 버렸습니다. 이 유토피아 관념은 공산주의에서 비로소 생긴 것이 아니고, 고대 희랍 철학에서도 또 성경에서도 많이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즉 구약에 기록된 이사야의 메시아 왕국관념, 신약에는 요한의 묵시 중에 보여진 기독교의 천년 세계, 토마스 무어의 <유토피아>, 그 외 뭇 성자나 이상주의자들은 이상보다 더 찬란한 유토피아의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 이 유토피아를 지구상에 실현하려고 실험해 본 일도 있습니다. 기독교 사상(史上)에 보이는 초대 기독교 수도원 또는 현재의 가정이라는 것이 일종의 그것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공통한 인류의 이상이요, 공산주의자들만의 전용물이 아닙니다. 요컨대 문제는 유토피아 관념이 좋으냐, 나쁘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도달하는 그 길이 어느 길이 바르냐 하는 방법론에 있는 것입니다. 그 길에는 (1) 기독교의 가르치는 길 (2) 사회주의자의 말하는 길 (3) 기독교 사회주의자의 제창하는 길 (4) 플라톤의 <공화국론(共和國論)>(Republic)에 표시한 길 (5) 공산주의자들의 부르짖는 길 등이 있습니다.

그러면 공산주의자의 걷는 길은 어떠한 길인가를 우리 기독교적 입장에서 검토하기 전에 공산주의의 의의(意義)를 밝히기로 하겠습니다. 사회주의니 공산주의니 하는 말은 모두 산업혁명 이후 19세기 초엽에 생긴 말인데, 그 연원은 1826년에 불란서(프랑스) 사상가 하시엘이 '사회주의'란 말을 그의 잡지에 처음 사용했고, 공산주의란 말은 그 해에 영국의 사상가 오웬이 처음 사용했습니다. 지금 공산주의라고 번역되는 'Communism'은 공공 부락(公共部落), 공유주의의 뜻을 가졌으니 공산주의란 말은 경제적 술어이고 정치적 술어가 아닙니다.

그런 것이 근래에 와서 공산주의란 말을 사회주의란 말과 거의 동일한 의미로 사용해 왔고, 또 극히 광범위한 다양(多樣)의 의미로 사용해 왔습니다. 어떤 사회주의 사전에 사회주의의 정의를 36개의 다른 의미로 기록했는데, 그 외에도 사회민주주의(社會民主主義), 무정부주의, 집산주의(集産主義), 기독교 사회주의 등 복잡한 사회사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 원인은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자본가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간격이 커짐에 따라 어떻게 하면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지위를 향상케 할까 함에 있는 것 입니다.

이 때에 독일에는 마르크스, 영국에는 엥겔스가 일어나서 1848년에 소위 공산당을 발표하였는데, 여기에서 공산주의의 핵심을 발견할 수 있게 되었고, 금일의 공산주의란 말은 이 마르크스주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르크스주의란 무엇입니까? 그의 사회철학인 변증법적 유물론과 유물사관에 의한 건데, 사회변혁은 물질적 생산력의 발전과 소비관계로 이루어지는 것을 주장하며 다른 요소는 전혀 무시한 태도를 간파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이상은 자본계급을 타파하고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향상시키는 것인데, 이것은 생산과 소비를 국유화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유물론적 사회철학을 가진 그들이 유물론에 중독되어 인간 생활에 있어서 물질 이상의 것에 대한 감상력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종교, 도덕, 예술에 대하여 전혀 몰이해합니다. 우리는 그들의 종교관이 얼마나 피상적이요, 맹목적인가 함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들의 견해에 의하면, "종교는 자본주의의 결과로 생겨진 생활고에서 도피하기 위하여 생겼다. 그러므로 종교는 아편과 같다. 노동자로 하여금 곤란한 현실에 무감각하게 만들어버린다. 또 자본가의 양심을 마비케 한다. 그러므로 자본주의가 없어지고 생활고가 없어지면 종교는 필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두 가지 큰 과오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종교가 생활고로 인하여 생겼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종교가 생활고에 허덕이는 인간을 위안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의 원인은 아닌 것입니다. 종교의 근원을 사회적으로 설명하면, (1) 종교는 인간의 환난의 시기뿐만 아니고 행복할 때에도 즐거움과 감사의 정으로 신을 예배하게 됩니다. (2) 인간은 도덕적 동물로 선을 탐구하며 양심적 생활을 동경하는 중에서 신을 예배하게 됩니다. (3) 또 인간이 인간 문제 우주 문제를 해결코자 하는 중에 즉 인생의 의의를 발견하고자 하는 데서 종교가 생겼고, (4) 인간 생활을 각 방면에 풍부히 하겠다고 하는 데서 종교가 생긴 것입니다.

둘째로는, 모든 인생의 괴로움이 사회 상태, 경제 상태로 기인한다는 말도 잘못입니다. (1) 어떤 괴로움은 천연적으로 옵니다. 병사, 천변, 지재, 등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인생은 아무래도 죽는 것입니다. (2) 경제적 이유 이 외에 자기의 죄로 인하여 오는 고통이 많습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에도 불구하고 종교를 그렇게 피상적으로 간주함은 유물론적 철학에 중독 된 까닭입니다.

그들은 또한 인류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 하여 노농 대중에게 계급의식을 고취하여 정권을 획득할 것이라고 주창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계급의식만이 있을 뿐이요, 민족이란 관념은 없습니다. 동일한 민족일 지라도 다른 계급이면 적이요, 다른 민족이지만 동일 계급이면 그들이 사용하는 말을 빌려 '동무'입니다. 민족적 독립보다 자기 계급의 정권 획득이면 그만입니다. 현상을 보아 대한의 좌익분자들이 대한 국호를 인민공화국이라고 부르짖고, 장차 '소련 연방' 가입 운운설도 이러한 계급사상에 근거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를 계급투쟁의 기록의 연결이라고만 보는 것은 큰 과오입니다. 생물계에나 인류의 역사를 보아 생존 경쟁이나 계급투쟁뿐 아니라, 상부상조와 협조의 현상을 또한 볼 수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더욱이 대한에 있어서 계급투쟁을 고취함은 거의 무의미하고 우리 민족에게 큰 화를 미치게 하는 것입니다. 그 까닭은 대한에는 대지주 자본가들이 다 일본인이었는데, 지금 그들은 다 쫓겨갔습니다. 이제 신정부가 수립되고 재산을 공정히 처리한다면 대한의 노농 문제는 자연히 해결될 것입니다. 현재 각 정당의 어느 정강(政綱 정치 강령)을 보든지 대기업은 국가의 경영으로 하고, 토지는 농민에게 분양하자는 조목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급의식을 고취하여 민족분열을 기도하며 민생의 긴급한 문제인 생활필수품 생산을 지연하게 함은 무슨 이유입니까? 금일의 소련도 슬라브 족속 중심의 국가이거늘, 하물며 민족통일이 대한 독립의 절대 조건인 금일에 있어서 이 마르크스식 계급투쟁 설에 중독된 사회 운동자야말로 대한 민족의 반역자라고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금일이야말로 우리 민족은 그리스도의 뜨거운 사랑을 가지고 애(愛)의 단결을 할 때입니다. 다음에 이 투쟁을 통한 혁명사상을 생각하건대, 물론 기독교에서도 때로는 혁명을 시인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부득이한 경우에만입니다. 할 수 있으면 혁명을 피하고 여론과 의회를 통하여 점진적으로 진화적으로 사회 제도를 개조함이 희생이 적고 제일 유리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공산주의자들은 혁명사상에 중독되어 혁명이 필요치 않은 곳에 혁명 운운하며 그야말로 평지에 풍파를 일으키고자 합니다.

지금 대한의 현실은 정당한 입법 기관과 정부만 수립되면 얼마든지 의회를 통하여 노농 계급의 권익을 확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혁명이 아니고 정당하게 합법적으로 얼마든지 싸울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연히 혁명 운운하고, 더욱이 혁명은 사회의 상태가 악화될수록 일어날 기회가 있다고 하여 이런 사상을 가진 자들이 대한의 곤궁을 더욱 유도하여 인민이 더욱 공경에 빠지도록 획책하는 모양입니다. 위조 화폐 사건, 공출 방해 등에 대한 말은 무엇을 시사합니까? 이런 분자들이야말로 종교적 도덕적 견지에서 뿐 아니고, 실로 인도적 견지나 민족적 견지에서 단연 용서할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맹성(猛省 깊이 반성하여 깨달음)을 촉구하여 마지 아니합니다.

이상 말한 바와 같이 유물사관을 사회철학으로 하고 계급투쟁을 주창하는 공산주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계급투쟁과 혁명을 통하여 전권을 얻은 후에는 독재하고 계급 없는 사회에 이를 때까지 무자비한 투쟁을 계속한다는 말입니다. 그리하여 자본계급과 지식계급과 그 밖의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모든 인물을 다 숙청하고, 봉건제도의 잔재인 종교와 도덕도 다 전멸시키고 생산기관이나 소비기관은 다 국유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부하린의 공산주의 ABC에 기록한 것을 보면 "그 때에는 상품은 없어지고 생산물뿐이며, 이는 매매되지도 않고 교환되지도 않으며 사회적 창고 내에 넣어두어 필요한 각 사람에게 그저 나누어 준다. 물론 화폐란 것도 무용한 종이조각이 되어 버린다." 이렇게 공산주의의 꿈같은 세계가 전개됩니다. 이 도원경(桃源境) 같은 세계가 이 지구에선 벌써 모 연방에 임하였는데, 대한에도 어서 완전히 임하기를 절망(切望 간절히 바람)하는 도배(徒輩 함께 어울려 나쁜 짓을 하는 무리)가 불소(不少 적지 아니함)한 모양입니다.

"돈은 쓸 데 없고 물건은 우리가 필요한 대로 그저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사회, 자본계급에서 일으키는 전쟁도 다시 있을 수 없고, 맹렬한 생존경쟁도 없는 이러한 사회가 얼마나 좋은가? 참 유토피아가 아니냐?"이런 사회를 누가 동경하지 아니하겠습니까?

그런데 한 가지 촛불처럼 분명한 사실은 이런 사회가 형성되려면 꼭 한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정권과 경제권을 한 손에 잡은 이가 하나님처럼 지혜롭고 사랑이 많아야 하며, 또 모든 인민은 천사처럼 선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하면 이런 사회를 이루기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못하여 인간의 성품이 이대로 존속한다면, 이런 인간을 데리고 공산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오직 계속적인 독재가 필요할 것입니다. 이러한 독재자는 일찍이 역사상에 유래가 없는 큰 권세를 가진 자입니다. 곧 전권과 경제권을 전부 쥐고 백성들에게 고루 빵을 먹일 것입니다. 마르크스의 말과 같이 능력에 의하여 일을 시키고 요구에 의하여 나누어 줄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기억할 것은 이런 사회에 자유는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먹는 것은 혹시 근심 없이 고루 먹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아무런 자유도 없고 그저 일이나 시키는 대로 하고 주는 대로 먹는 사람을 옛날엔 종이라고 불렸는데, 공산사회에서만 인민이라고 부르는 모양입니다. 또 이 공산사회에서는 계급이 없다고 합니다. 천만의 말입니다. 명사는 변할는지 모르나 계급은 그냥 뚜렷이 존속할 것입니다. 치자(治者) 계급과 피치자 계급(평민), 혹은 공산당원과 인민이 그것입니다.

현재 북한에서는 미곡 공출을 시켜서는 일부는 공산당 간부에, 잔부(殘部 남은 부분)는 공산당원만 배급하여 주고 일반 인민에게는 주지 않습니다. 또 모 연방에서 치자 계급은 궁전에서 전날의 귀족과 동일한 호화스러운 생활하는 반면에, 평민은 저급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상식 있는 사람은 다 짐작할 수 있는 사실입니다. 북한에 가서 보시오!

또 말하기를 독재는 과도기일 뿐이요, 혁명이 완성되면 완전히 민주주의가 됩니다고 합니다. 그러나 현재 모 연방은 혁명이 있은지 거의 30여 년이나 되었는데, 왜 독재는 계속되는가? 내가 단언하는 것은 마르크스식 공산사회에서는 독재는 언제든지 계속될 것입니다. 그 이유는 (1) 러셀의 이론과 같이 사람이 일하는 것은 소유적 충동과 창조적 충동에서인데, 이 사회에서는 전자는 없어지고 후자에 의해서만 일하게 될 것이니 그것은 극소수일 것입니다. 곧 이 공산사회에서는 인민들이 열심히 일을 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하여 독재적으로, 폭력적으로 노동을 강행하지 아니하면 국가를 유지하기 곤란할 것입니다. (2) 그러나 인간의 본성인 소유욕은 그냥 남아 있어 일을 아니하고도 많은 소유하려고 할 터이니 이것을 억제하기 위하여 독재가 필요하게 됩니다. (3) 고금을 막론하고 독재자는 자발적으로 권리를 내놓는 법은 없고, 또 '권리는 언제나 부패한다.'(루소) 이것을 숙청하려면 혁명이 필요하고 혁명에는 독재가 반드시 따라가니 또 독재의 계속입니다.

독재가 없는 공산사회를 이루려면 그 사회를 형성하고 있는 인민 각자가 서로 사랑하면 가능합니다. 가정은 일종의 공산사회입니다. 또는 각자가 지선(至善)하면 됩니다. 수도원이나 원시 기독교가 그러하였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독재가 있어야 공산사회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공산주의는 종교나 도덕을 정배(定配 귀양)보낸 지 이미 오래입니다. 그러므로 독재는 반드시 계속됩니다.

마지막으로 공산주의 사상이 도덕과 인격에 미치는 일반 영향에 대하여 말하려 합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성경이 가르치는 도덕을 봉건시대의 도덕이라고 비웃습니다. 그렇습니다. 공산주의는 '네 것 내 것 불변 없는 것이니' 성경의 제 8계명과 십계명이 쓸데없어집니다. 아무 것이나 다 공산이니까 아무 것이나 가져와도 도둑질이 아닙니다. 그 사회에서는 도둑놈이 하나도 없게 됩니다.

또 가족에게도 봉건시대의 유물이니 신시대에는 정조라는 거추장스러운 관념을 내버리고 자유로운 성(性)생활을 향유해야 한다고 부르짖습니다. 레닌도 "아이들과 일하는 데 장애가 없는 한 아내는 3일 만에 한 번씩 바꾸어도 상관치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성경의 제7계명이 무용하게 됩니다. 북한에 강간죄가 없어지고 이혼이 성행된다는 말을 듣습니다. 이런 사회가 어떠한 추태를 양성하겠습니까? 이는 물어볼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이 사상에 미혹하는 것은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생존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생활하기 위해서이다." 오스카 와일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1848년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발표한 공산당 선언 첫 구절은 이런 말로 시작합니다. "한 괴물이 유럽을 횡행하고 있다. 곧 공산주의란 괴물이다." 저들의 말 그대로 공산주의이야 말로 일대 괴물입니다. 이 괴물이 지금 삼천리 강산에 횡행하며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이 괴물을 벨 자 누구입니까? 이 사상이야말로 묵시록에 있는 붉은 용입니다. 이 용을 멸할 자 누구입니까? 사람은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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