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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연재② 체코 보헤미아의 얀 후스

- ‘교회의 참 머리는 교황이 아니라 그리스도’라고 천명

편집국|2017-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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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얀 후스의 동상 아래엔 그가 화형 당하는 순간 외쳤다는 ‘진실의 7명제’가 쓰여 있다. 
▲ “진실만을 찾아라. 진실만을 들어라. 진실만을 배워라. 진실만을 사랑하라. 진실만을 말하라. 진실만을 지켜라. 죽음을 두려워 말고 진실만을 사수하라.”
▪보헤미아 민족주의의 상징

영국에서 롤라드파에 대한 탄압조치가 한창인 14세기 후반기에 체코 보헤미아에서는 카톨릭교회에 대한 개혁의 물결이 고조되고 있었다. 이 와중에 두각을 나타낸 사람이 얀 후스(John Hus, 1371-1415)이다.

당시 위클리프가 교수로 봉직하고 있던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과 후스의 모교인 보헤미아의 프라하 대학 사이에는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1383년 영국 왕 리차드2세와 보헤미아 공주 안나와의 결혼으로 양국은 가까운 관계를 갖고, 보헤미아 청년들이 대거 옥스퍼드 대학에 유학생 신분으로 건너가 있었다. 당시 위클리프의 영역 복음서들이 왕비 안나에게 기증되었고, 유학생들은 위클리프의 저서들을 보헤미아로 가져왔다.

그런 이유로, 1380년대 초반기에는 벌써 위클리프의 저서들이 보헤미아 사람들에게 읽혀지고 있었다. 위클리프의 가르침에 깊은 감명을 받고 위클리프주의를 프라하로 들여오는데 큰 역할을 한 인물은 프라하 제롬(Jerome of Praque, 1371-1416)이다. 제롬은 후스의 제일가는 친구요 제자이기도 했다. 후스는 영국에 유한학 일이 없으면서도 제롬을 위시한 보헤미아 유학셍들을 통하여 위클리프의 저서들을 접하게 되었다.

후스는 위클리프와 같이 “교회는 예정된 자들로서만 구성되며, 교회의 참 머리는 교황이 아니라 그리스도요, 교회의 법은 신약성경이요, 교회생활은 그리스도와 같은 청빈의 생활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극히 성경적 교회의 가르침이다. 그런데 중세에는 이같은 당영한 교회의 가르침도 로마 카톨릭교회로부터 위험한 이단사상으로 간주됐다.


▪프라하 베들레헴교회 설교자

▲ 얀 후스가 설교했던 베들렘헴 교회, 지금 교회 모습보다 더 단촐한 내부전경.  
그는 집안이 가난했기 때문에 프라하 대학교에 다닐 때 노래를 부르고 노동을 하는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었다. 그렇게 하여 1393년에 문학사 학위를 받았고, 1년 후에 신학사 학위를 받아, 1401년에 가톨릭교회에서 사제로 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다음해에 프라하대학의 신학부장 겸 프라하 베들레헴교회의 설교자가 되었다. 그는 보헤미아어로 설교했다.


후스는 카톨릭교회의 성직 위계제도
(성경의 집사, 장로, 감독외에 추기경과 교황으로 이어지는 카톨릭 성직제도)에 회의를 가졌다. 당시 체코 교회는 슬라브 민족주의와 보헤미아 민족주의 간의 갈등으로 교황청은 복잡한 문제들에 얽혀 있었다. 그로인해 프라하의 후스의 적수들은 그를 1407년 로마 교황청에 고발했다. 그러나 이 사건이 미결상태로 심리되고 있는 동안 교황청은 분열이 생겨 후스에 대한 고발건을 다룰 수가 없었다. 그 사이 후스가 프라하 대학의 초대총장이 되었고 그의 주장이 보헤미아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처음에는 후스의 개혁운동을
위클리프주의라고 부르던 것이 후스가 보헤미아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신임을 받게되자 이제는 후스주의라는 말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정통파 교권주의자들은 후스주의를 억압하는 일이 급선무가 된 것이다.


후스가
1409년 프라하 대학 내에 있는 보헤미아파 사람들의 지도자가 되어 교회의 개혁과 보헤미아 국민들의 정치적, 종교적 권리를 대변하게 되자 카톨릭 교권주의자들은 후스를 이단으로 몰기 시작했다. 그러나 국민들은 후스의 설교에 귀를 기울였다. 


당시 교황청은 아비뇽에서
1377년 로마로 돌아온 그레고리우스2세가 줒자, 이탈리아 출신 우레바누스6세를 새교황으로 세웠다. 그러나 이에 불복한 프랑스 출신 추기경들은 4개월후에 클레멘트7세를 교황으로 뽑은뒤 그를 대동하고 아비뇽으로 돌아갔다. 이제 유럽에는 로마계 교황아비뇽계 교황으로 나눠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로마 교황을 지지하는 나라는 영국, 스칸디나비아, 독일 대부분, 이탈리아 북.주부였고, 아비뇽 교황을 지지하는 나라는 프랑스, 스페인, 스코틀랜드, 나폴리, 시실리, 독일 일부 등이었다. 이리하여 로마교회는 1378년부터 1417년까지 40년간 대분열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이에 교회를 통합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나 보헤미아 왕과 프랑스 왕의 주선으로
1409년에 피사(Pisa)에서 공의회가 열렸다. 이 공의회는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교회의 머리가 달리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며, 현재 재위중인 두 대립 교황(로마계, 아비뇽계)들은 교회의 연합을 해친 자들이라는 책임 추궁을 받아 파면되고, 새로운 인물인 알렉산더5세가 새교황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로마교황이나, 아비뇽교황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제는 교황이 피사계교황까지 셋이 된 것이다. 


후스파의 분열로 탄압 빌미 제공


이 때 후스의 활동을 못마땅히 여겨온 프라하의 대주교 스빈코
(Sbinko)는 자신들이 옹립한 피사계 교황 알렉산더5세를 이용하여 프라하에 있는 베들레헴교회에서 후스가 설교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위클리프의 저서를 불태우라는 교황령을 받아냈다.


후스를 침묵시키려는 의도였다
. 그리하여 1410년 위클리프의 저서들이 불태워졌고, 대주교는 후스를 파문했다. 후스가 파문당하자 프라하에서는 대중들의 소동이 일어나 오히려 후스는 민족적 영웅이 되어갔다. 이런 가운데 1410년 알렉산더5세 교황이 갑자기 죽고 그를 이어 요한23세가 새로운 피삭게 교황이 되었다. 새 교황이 십자군을 소집하면서 기금을 모으기 위해 면죄부 판매를 시작하자 후스는 이에 반대운동을 벌였다. 이에 교황은 1412년에 후스를 파면하고 프라하에서 그를 추방했다. 


그래도 대중은 후스를 지지했다
. 그러나 후스파는 두 유파 분열했다. 하나는 칼리스파(Calixtines:성배파)이고, 다른 하나는 타보르파(Taborites)이다. 칼리스파는 성찬 때 떡과 잔을 평신도에게 허용해야 한다는 양형성찬파로서 대체로 귀족적인 사람들의 모임이고, 타보르파는 노동자 농민 등을 대표하는 계층으로서 보다 과격한 집단이었다. 점진적인 개혁을 주장한 칼릭스파는 종교적인 문제에 불만이 큰 반면, 타보르파는 사회적 문제에 불만이 컸다. 타보르파는 화체설과 성인숭배, 죽은자를 위한 기도, 면죄부, 고해성사, 맹세춤과 오락을 금지했다. 이 두파는 끝내 서로 대립하다가 프라하에서 22,000명이 학살을 당하는 참사가 발생하자, 1434530리판전투라는 일대 접전을 벌여 많은 사람이 죽고 서로 원수지간이 되어 보헤미아가 분열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정죄 받아 화형당해

          ▲ Jan Hus at the Council of Constance, Vaclav Brozik: 1415

이런 와중에 보헤미아의 왕도 겸하고 있던 신성로마 황제 지기스문트가 피사계 교황 요한 23세의 동의를 받아 콘스찬츠에서 141411월 공의회를 개최했다. 1918년까지 45차례의 회의를 가진 이 공의회는 교회 대분열을 수습하고, 공의회의 결정이 교황의 결정보다 우위에 있다고 확인함으로써 중세 기독교 역사상 가장 중요한 공의회로 평가된다.


황제는 보헤미아의 분열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후스가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후스를 공의회에 초청했다
. 후스는 황제로부터 안전통행권을 약속받고 친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공의회에 참석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그리고 공의회는 141554일 회의 도중 영국의 위크리프를 정죄하여 그 시체를 파내 불사르도록 결정하고, 76일 후스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콘스탄츠 시 외곽에서 화형시켰다. 후스의 친구 프라하의 제롬도 얼마 후 히르샤우에서 체표되어 콘스탄츠로 압송돼 화형 당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꼭 100년 전의 일이다. 


루터와 칼뱅의 종교개혁은 얀 후스라는 줄기 위에 열린 열매였다
. 후스는 체코말로 거위란 뜻이다. 후스는 화형당하면서 너희가 지금 거위를 불태워 죽이지만 100년 뒤 나타난 백조는 어쩌지 못할 것이란 말을 해 루터의 등장과 종교개혁을 예언했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이후 후스파는 보헤미아 형제단
(Bohemian Brethren)이란 종교단체를 만들었는데, 카톨릭의 심한 박해를 받다가 18세기에 이르러 진젠돌프 백작의 지도아래 모라비안 형제들(Moravian Brethren)이 되었다.


모라비안 형제단은 후스를 따르던 보헤미아 동부지방 모라비아에서 일어난 종교집단이다
. 이들은 진제돌프 백작의 보호아래 새로운 선교공동체를 만들어 유럽, 영국, 서인도제도, 미국 펜실베니아 등지에 선교사를 파송했다. 이들 대부분은 목공, 조리사, 정비공, 제빵업 등의 기술을 배운 평신도 선교사였다. / 한국기독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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